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Nagorno-Karabakh War)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사건기간 : 1988년 2월 20일~1994년 5월 16일, 조회수 : 776, 등록일 : 2020-10-04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전쟁은 두나라간의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독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으로서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나 이후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한 분쟁이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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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1988년 하계 올림픽(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잉글랜드 셰필드의 힐스버러 스타디움(Hillsborough Stadium)에서 발생한 대형 군중 압사 사고로 총 97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을 입은 최악의 축구 경기 참사다. 이 참사는 [1]FA컵 준결승 경기인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경기 도중 발생했다.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리그가 아닌 중립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며, 양 팀의 팬들이 각각 다른 스탠드에 배정되었다.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찰은 빠르게 입장시키기 위해 출구로 사용하던 출입문(게이트 C)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입구와 터널을 통해 밀려 들어갔고, 중앙 앞쪽에 위치한 스탠드에서 극심한 압박이 발생했다. 앞쪽 구역의 관중들은 난간과 철제 울타리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고 구조나 퇴장도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관중이 압사하거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숨졌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상황이 심각했지, 경기장 내부에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찰과 경기 관계자들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경기 중단과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참사가 이미 발생한 이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은 리버풀 팬들의 난동과 술에 취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보도했으며, 특히 더 선(The Sun)의 보도는 "팬들이 죽은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등의 허위 주장으로 리버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는 리버풀 지역에서 수십 년간 더 선 신문이 불매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와 독립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참사의 주된 원인은 경찰과 경기 운영 측의 잘못된 군중 관리, 비효율적인 경기장 구조, 늦은 응급 대응이었다. 팬들은 오히려 참사의 피해자였으며, 초동 대처의 실패와 경찰의 은폐 시도가 추가 피해를 키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법원 배심원단이 "사망자 97명은 경찰의 과실과 조직적 실패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판결하였다. 이후 경찰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실질적인 처벌을 피하면서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열고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 안전 기준과 군중 통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 좌석화 정책(standing 구역 폐지)과 안전 설계 기준의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구조와 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챌리지 컵.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속한 모든 구단들이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리그가 아닌 중립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며, 양 팀의 팬들이 각각 다른 스탠드에 배정되었다.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찰은 빠르게 입장시키기 위해 출구로 사용하던 출입문(게이트 C)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입구와 터널을 통해 밀려 들어갔고, 중앙 앞쪽에 위치한 스탠드에서 극심한 압박이 발생했다. 앞쪽 구역의 관중들은 난간과 철제 울타리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고 구조나 퇴장도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관중이 압사하거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숨졌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상황이 심각했지, 경기장 내부에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찰과 경기 관계자들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경기 중단과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참사가 이미 발생한 이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은 리버풀 팬들의 난동과 술에 취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보도했으며, 특히 더 선(The Sun)의 보도는 "팬들이 죽은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등의 허위 주장으로 리버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는 리버풀 지역에서 수십 년간 더 선 신문이 불매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와 독립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참사의 주된 원인은 경찰과 경기 운영 측의 잘못된 군중 관리, 비효율적인 경기장 구조, 늦은 응급 대응이었다. 팬들은 오히려 참사의 피해자였으며, 초동 대처의 실패와 경찰의 은폐 시도가 추가 피해를 키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법원 배심원단이 "사망자 97명은 경찰의 과실과 조직적 실패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판결하였다. 이후 경찰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실질적인 처벌을 피하면서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열고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 안전 기준과 군중 통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 좌석화 정책(standing 구역 폐지)과 안전 설계 기준의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구조와 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챌리지 컵.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속한 모든 구단들이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
천안문 민주화운동은 1989년 6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베이징 천안문에 운집한 학생과 지식인은 물로 이들을 돕던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유혈 사건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가장 대규모로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인민들은 개혁개방 이후 심각한 관료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며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약 2,500으로 발표되었다.
강제 진압후 6월4일에 중국공산당은 시위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가장 대규모로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인민들은 개혁개방 이후 심각한 관료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며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약 2,500으로 발표되었다.
강제 진압후 6월4일에 중국공산당은 시위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1]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당 정권이 무너졌다. 벨벳 혁명은 중앙유럽 민주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벨벳혁명은 체코를 비롯,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소련군에 점령당하며 공산화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이때 권력을 장악한 [3] 구스타프 후삭의 감시와 통제가 지속됐다.
소련군의 프라하침공을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반체제운동이 전개되었고 [4]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전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2] 바츨라프 하벨은 긴급하게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연대체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비폭력을 표방하며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이른바 벨벳혁명을 통해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2]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년~2011년) : 체코의 극작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3] 구스타프 후삭(Gustav Husak, 1913년~1991년)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지닌 인물
[4]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 : 현 체코의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광장
벨벳혁명은 체코를 비롯,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소련군에 점령당하며 공산화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이때 권력을 장악한 [3] 구스타프 후삭의 감시와 통제가 지속됐다.
소련군의 프라하침공을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반체제운동이 전개되었고 [4]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전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2] 바츨라프 하벨은 긴급하게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연대체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비폭력을 표방하며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이른바 벨벳혁명을 통해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2]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년~2011년) : 체코의 극작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3] 구스타프 후삭(Gustav Husak, 1913년~1991년)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지닌 인물
[4]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 : 현 체코의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광장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오전 2시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쿠웨이트를 점령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는 국제적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을 편성하여 이라크를 제재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국제연합은 이라크에 쿠웨이트 합병 철회와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의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작전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와 미군 군사 기지 설치하였다.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거부하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의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 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이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년~현존)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재위 : 2001년~2009년)
미국과 국제연합은 이라크에 쿠웨이트 합병 철회와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의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작전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와 미군 군사 기지 설치하였다.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거부하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의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 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이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년~현존)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재위 : 2001년~2009년)
독일의 재통일(독일어:Deutsche Wiedervereinigung)은 1990년 10월 3일에 과거 독일 민주 공화국(German Democratic Republic, 동독)에 속하던 5개주가 독일 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 서독)에 가입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참혹한 무력 충돌로, 약 11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초래한 내전이다. 1991년 3월 23일 [2]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 조직인 [1]혁명연합전선이 시에라리온 동부 국경 지역을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991년 민족과 지역 간 갈등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7개 나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1980대 후반에 소련의 [1]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정책은 경제의 침체를 극복하고 정치적 체제의 존속을 도모하였지만, 동시에 공산당 통제의 약화와 민족주의의 분출을 초래했다. 경제는 침체되었고, 각 공화국들은 점차 소련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보수파 공산당 세력이 [1]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2]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2일만에 실패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변화를 초래했다. 각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중앙 권력은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대신에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3]보리스 옐친이 실질적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공화국들은 더 이상 연방 유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해 12월, 러시아의 대통령 [3]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4]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최고회의 의장 [5]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는 비밀리에 회동했다. 세 사람은 벨라루스의 [6]벨라베자 숲에 위치한 산장에 모였다. 12월 8일, 세 지도자는 비밀 협상 끝에 벨라베자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소련의 해체와 국제법적 계승의 포기를 명시했다. 즉, 소련은 더 이상 주권국가로 존재하지 않으며, 기존의 15개 공화국은 독립된 국가로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7]독립국가연합(CIS)을 설립하여 각 공화국이 경제·군사·외교적 협의와 협력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셋째, 핵무기 관리 체제를 규정하여 구소련의 핵무기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에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의 최종 통제권을 가지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 협정은 사실상 소련의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해 즉시 반발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소련의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협정이 헌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와 군부는 이미 옐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공화국들도 독립 의사를 공식화했다.
12월 21일, 카자흐스탄의 도시 [9]알마티에서 11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10]알마아타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7]독립국가연합(CIS)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고, 다음 날인 12월 26일 소련 최고회의 상원(연방평의회)은 소련의 해체를 공식 승인하였다. 붉은 깃발이 [8]크렘린에서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의 삼색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벨라베자 협정은 단순한 정치적 문서가 아니라 냉전 구도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구소련 지역은 독립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경제 붕괴, 국경 분쟁, 민족 갈등, 핵무기 통제 문제 등이 남았다. 러시아는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계승했지만 제국의 해체라는 역사적 상실감은 이후 몇십 년 동안 정치적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벨라베자 협정의 서명 장소였던 [6]벨라베자 숲은 현재 벨라루스와 폴란드 국경에 걸친 자연 보호구역으로 남아 있으며 냉전 시대의 종식을 상징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1]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3월 2일~2022년 8월 30일) : 소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5년 3월 11일~1991년 8월 24일), 소련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0년 3월 15일~1991년 12월 25일)
[2] 8월 쿠데타(1991년 8월 19일~1991년 8월 21일) :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으킨 쿠데타. 이틀 만에 실패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3]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 2월 1일~2007년 4월 23일) : 러시아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7월 10일~1999년 12월 31일)
[4] 레오니드 크라우추크(Leonid Makarovych Kravchuk,1934년 1월 10일~2022년 5월 10일) :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12월 5일~1994년 7월 19일)
[5]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1934년 12월 15일 ~ 2022년 5월 3일) : 벨라루스의 정치인으로 초대 벨라루스의 국가 원수. 소련의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서기장 역임
[6] 벨라베자 숲(러시아어, Belovezhskaya pushcha) :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국경에 걸쳐있는 원시림. 유럽에 남은 마지막 원시림이며 유럽들소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1979년 폴란드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1992년에는 벨라루스 지역이 추가로 등재되었다
[7]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 소련의 붕괴로 인해 독립국가가 된 구 소련 공화국들의 연합체로서 결성된 국제기구이자 국가연합
[8] 크렘린 :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 "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역사적인 러시아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성 단지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크렘린으로는 모스크바 크렘린이 있다. 흔히 말하는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부에 위치한 궁전을 말한다
[9] 알마티(Almaty) : 1925년부터 1994년까지 카자흐스탄 수도.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알마아타에서 알마티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0] 알마아타 의정서(Alma-Ata Protocol) : 1991년 12월 21일에 서명되었으며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을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11개 구소련 공화국이 서명한 이 의정서는 상호 인정, 평등, 그리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포함한 신생 독립국 간의 협력 원칙을 제시했다
1991년 8월, 보수파 공산당 세력이 [1]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2]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2일만에 실패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변화를 초래했다. 각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중앙 권력은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대신에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3]보리스 옐친이 실질적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공화국들은 더 이상 연방 유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해 12월, 러시아의 대통령 [3]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4]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최고회의 의장 [5]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는 비밀리에 회동했다. 세 사람은 벨라루스의 [6]벨라베자 숲에 위치한 산장에 모였다. 12월 8일, 세 지도자는 비밀 협상 끝에 벨라베자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소련의 해체와 국제법적 계승의 포기를 명시했다. 즉, 소련은 더 이상 주권국가로 존재하지 않으며, 기존의 15개 공화국은 독립된 국가로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7]독립국가연합(CIS)을 설립하여 각 공화국이 경제·군사·외교적 협의와 협력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셋째, 핵무기 관리 체제를 규정하여 구소련의 핵무기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에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의 최종 통제권을 가지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 협정은 사실상 소련의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해 즉시 반발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소련의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협정이 헌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와 군부는 이미 옐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공화국들도 독립 의사를 공식화했다.
12월 21일, 카자흐스탄의 도시 [9]알마티에서 11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10]알마아타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7]독립국가연합(CIS)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고, 다음 날인 12월 26일 소련 최고회의 상원(연방평의회)은 소련의 해체를 공식 승인하였다. 붉은 깃발이 [8]크렘린에서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의 삼색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벨라베자 협정은 단순한 정치적 문서가 아니라 냉전 구도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구소련 지역은 독립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경제 붕괴, 국경 분쟁, 민족 갈등, 핵무기 통제 문제 등이 남았다. 러시아는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계승했지만 제국의 해체라는 역사적 상실감은 이후 몇십 년 동안 정치적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벨라베자 협정의 서명 장소였던 [6]벨라베자 숲은 현재 벨라루스와 폴란드 국경에 걸친 자연 보호구역으로 남아 있으며 냉전 시대의 종식을 상징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1]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3월 2일~2022년 8월 30일) : 소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5년 3월 11일~1991년 8월 24일), 소련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0년 3월 15일~1991년 12월 25일)
[2] 8월 쿠데타(1991년 8월 19일~1991년 8월 21일) :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으킨 쿠데타. 이틀 만에 실패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3]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 2월 1일~2007년 4월 23일) : 러시아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7월 10일~1999년 12월 31일)
[4] 레오니드 크라우추크(Leonid Makarovych Kravchuk,1934년 1월 10일~2022년 5월 10일) :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12월 5일~1994년 7월 19일)
[5]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1934년 12월 15일 ~ 2022년 5월 3일) : 벨라루스의 정치인으로 초대 벨라루스의 국가 원수. 소련의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서기장 역임
[6] 벨라베자 숲(러시아어, Belovezhskaya pushcha) :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국경에 걸쳐있는 원시림. 유럽에 남은 마지막 원시림이며 유럽들소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1979년 폴란드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1992년에는 벨라루스 지역이 추가로 등재되었다
[7]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 소련의 붕괴로 인해 독립국가가 된 구 소련 공화국들의 연합체로서 결성된 국제기구이자 국가연합
[8] 크렘린 :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 "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역사적인 러시아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성 단지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크렘린으로는 모스크바 크렘린이 있다. 흔히 말하는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부에 위치한 궁전을 말한다
[9] 알마티(Almaty) : 1925년부터 1994년까지 카자흐스탄 수도.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알마아타에서 알마티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0] 알마아타 의정서(Alma-Ata Protocol) : 1991년 12월 21일에 서명되었으며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을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11개 구소련 공화국이 서명한 이 의정서는 상호 인정, 평등, 그리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포함한 신생 독립국 간의 협력 원칙을 제시했다
1991년 12월 11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린 유럽공동체(EC) 12개국이 새로운 유럽연합(EU) 설립에 합의하고 1993년 11월 1일부터 효력이 발휘되었다.
정식명칭은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이며, 유럽공동체(EC)는 유럽연합(EU:European Unio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조약으로 유로화가 도입되었으며, EU의 3가지 중심 구조인 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에 관한 회원국들의 협조가 제안되었다.
회원국 각국 국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했으며 단일화폐가 통용되는 거대 자유무역시장이 탄생되었다.
조약 참여국 12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다
정식명칭은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이며, 유럽공동체(EC)는 유럽연합(EU:European Unio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조약으로 유로화가 도입되었으며, EU의 3가지 중심 구조인 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에 관한 회원국들의 협조가 제안되었다.
회원국 각국 국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했으며 단일화폐가 통용되는 거대 자유무역시장이 탄생되었다.
조약 참여국 12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다
2차 세계대전 종식이후 세계는 미국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려 냉전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소련의 대통령이자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이양하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약 70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어 온 냉전 시대가 무너졌다.
소련붕괴 최후의 순간은 크리스마스인 1991년 12월 25일에 일어났다. 이날 러시아 최고인민회의는 국명을 1918년에 레닌이 정한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러시아연방'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시38분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소련국기는 영원히 내려갔다.
소련의 붕괴로 미국의 상대적 위치는 최정상으로 올라섰고 이후 탈냉전 시기의 국제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적 일국 체제로 바뀌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2007년) : 러시아 초대 대통령, 임기: 1991년 7월 10일 ~ 1999년 12월 31일
*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공화국 15개 : 리투아니아, 조지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 크렘린(Kremlin) :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통령궁
소련의 붕괴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소련의 대통령이자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이양하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약 70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어 온 냉전 시대가 무너졌다.
소련붕괴 최후의 순간은 크리스마스인 1991년 12월 25일에 일어났다. 이날 러시아 최고인민회의는 국명을 1918년에 레닌이 정한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러시아연방'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시38분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소련국기는 영원히 내려갔다.
소련의 붕괴로 미국의 상대적 위치는 최정상으로 올라섰고 이후 탈냉전 시기의 국제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적 일국 체제로 바뀌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2007년) : 러시아 초대 대통령, 임기: 1991년 7월 10일 ~ 1999년 12월 31일
*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공화국 15개 : 리투아니아, 조지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 크렘린(Kremlin) :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통령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슈냐크계(이슬람교), 크로아티아계(카톨릭), 세르비아계(정교회)등으로 구성된 3개의 언어와 민족,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사태(1992 Los Angeles Riots, Rodney King Riots, South Central Riots, 1992 Los Angeles Civil Disturbance, 1992 Los Angeles Civil Unrest)는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에 의해 발생한 유혈사태였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 LA 경찰청 4명의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운전한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였다.
이러한 경찰관들의 집단폭행으로 로드니 킹은 평생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의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사회에서 잠재되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었다.
분노는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 6일동안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흑인들의 한인 반감이 더해지면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어 한인들은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LA한인 사회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사이구(4.29)'라고 불리고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재산 피해액이 약 10억 달러 이상, 총 50여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 LA 경찰청 4명의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운전한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였다.
이러한 경찰관들의 집단폭행으로 로드니 킹은 평생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의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사회에서 잠재되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었다.
분노는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 6일동안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흑인들의 한인 반감이 더해지면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어 한인들은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LA한인 사회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사이구(4.29)'라고 불리고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재산 피해액이 약 10억 달러 이상, 총 50여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역사와 전통, 민족이 다른 두 개의 국가였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으로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왔던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하나의 나라로 독립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약 1천여년간 서로 다른 역사속에서도 [2] 슬라브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언어적 유사성으로 교류와 연대를 유지해왔으며 두 민족이 가진 이해관계를 통해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낀 두 민족은 갈라서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다시 하나의 국가로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서서히 파고 들어온 공산주의와 친소련 정책으로 공산화되어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독재가 지속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1969년 정치개혁을 통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시행하게 된다.
1989년 11월 4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과 소련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혁명이 일어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 벨벳혁명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벨벳혁명이후 급속한 개혁의 추진은 또 다시 민족 문제를 야기시킨다. 개혁의 부작용이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또한 노선과 방향이 판이하게 다른 두 정당이 연방의회를 이끌게 되면서 상호 알력과 반목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두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해체를 합의하게 되면서 1993년 1월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나뉜다.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처럼 두 국가의 분리가 평화롭게 진행되어 '벨벳이혼'이라고도 불린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국가는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로에 가입했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앙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다
[2] 슬라브(Slavs)족 : 동슬라브족(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슬라브족(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남슬라브족(불가리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
[3] 벨벳혁명(1989년 11월 17일~1989년 12월 29일) : 1989년 평화적인 시위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약 1천여년간 서로 다른 역사속에서도 [2] 슬라브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언어적 유사성으로 교류와 연대를 유지해왔으며 두 민족이 가진 이해관계를 통해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낀 두 민족은 갈라서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다시 하나의 국가로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서서히 파고 들어온 공산주의와 친소련 정책으로 공산화되어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독재가 지속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1969년 정치개혁을 통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시행하게 된다.
1989년 11월 4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과 소련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혁명이 일어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 벨벳혁명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벨벳혁명이후 급속한 개혁의 추진은 또 다시 민족 문제를 야기시킨다. 개혁의 부작용이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또한 노선과 방향이 판이하게 다른 두 정당이 연방의회를 이끌게 되면서 상호 알력과 반목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두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해체를 합의하게 되면서 1993년 1월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나뉜다.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처럼 두 국가의 분리가 평화롭게 진행되어 '벨벳이혼'이라고도 불린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국가는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로에 가입했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앙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다
[2] 슬라브(Slavs)족 : 동슬라브족(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슬라브족(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남슬라브족(불가리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
[3] 벨벳혁명(1989년 11월 17일~1989년 12월 29일) : 1989년 평화적인 시위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
오슬로 협정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갈등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이다.
1993년 8월 20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합의한 후, 곧이어 9월 13일 워싱턴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재하에 이스라엘 [1]라빈 총리와 [3]아라파트 [4]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안에 서명함으로써 두 민족간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3]아라파트 의장과 [1]라빈 총리, 그리고 협상에 참여한 이스라엘 외무장관 [2]시몬 페레스는 이 협정 체결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6]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1996년 1월 아라파트 PLO 의장이 [5]자치정부(PA) 초대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 [1]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4일에 협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도 1996년 강경파인 [7]하마스의 자살폭탄 테러가 계속되는 등 위기가 이어졌지만, 2000년 중반까지 서안의 40%, 가자지구의 65%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직접 또는 부분적인 관할로 이양되었다.
이처럼 오슬로 협정은 역사적 합의였음은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이후 획기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자치정부의 최종성격인 동예루살렘의 지위, 유대인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등을 다루는 최종지위협상이 2000년 7월 결렬되고 9월에는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요르단 강 서안지지구와 가자 지구의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구에서는 양측의 유혈 충돌과 자살 폭탄·흉기 공격 사건이 지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은 계속 확장됐다.
현재 서안지구의 구분을 보면 팔레스타인이 온전히 행정과 보안을 관할하는 지역은 18%이며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공동지역)는 22%, 이스라엘이 완전히 통제하는 지역은 60%이다.
[1]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년~1995년): 이스라엘의 17대(재임 1974년 6월 3일~1977년 6월 20일), 25대 총리(1992년 7월 13일~1995년 11월 4일)
[2]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년~2016년) : 이스라엘의 제9대 대통령(재임 2007년 7월 15일~2014년 7월 24일),
[3]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3대 의장(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1964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설립된 단체
[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NA, Palestine National Authority) : PLO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여 국제연합 옵서버 국가로 인정받으면서 2013년에 팔레스타인의 정부로 바꾸고 독립했다.
[6] 예리코(Jericho) :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 행정 구역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속하며 예리코주의 주도이다
[7]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1993년 8월 20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합의한 후, 곧이어 9월 13일 워싱턴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재하에 이스라엘 [1]라빈 총리와 [3]아라파트 [4]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안에 서명함으로써 두 민족간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3]아라파트 의장과 [1]라빈 총리, 그리고 협상에 참여한 이스라엘 외무장관 [2]시몬 페레스는 이 협정 체결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6]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1996년 1월 아라파트 PLO 의장이 [5]자치정부(PA) 초대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 [1]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4일에 협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도 1996년 강경파인 [7]하마스의 자살폭탄 테러가 계속되는 등 위기가 이어졌지만, 2000년 중반까지 서안의 40%, 가자지구의 65%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직접 또는 부분적인 관할로 이양되었다.
이처럼 오슬로 협정은 역사적 합의였음은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이후 획기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자치정부의 최종성격인 동예루살렘의 지위, 유대인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등을 다루는 최종지위협상이 2000년 7월 결렬되고 9월에는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요르단 강 서안지지구와 가자 지구의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구에서는 양측의 유혈 충돌과 자살 폭탄·흉기 공격 사건이 지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은 계속 확장됐다.
현재 서안지구의 구분을 보면 팔레스타인이 온전히 행정과 보안을 관할하는 지역은 18%이며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공동지역)는 22%, 이스라엘이 완전히 통제하는 지역은 60%이다.
[1]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년~1995년): 이스라엘의 17대(재임 1974년 6월 3일~1977년 6월 20일), 25대 총리(1992년 7월 13일~1995년 11월 4일)
[2]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년~2016년) : 이스라엘의 제9대 대통령(재임 2007년 7월 15일~2014년 7월 24일),
[3]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3대 의장(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1964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설립된 단체
[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NA, Palestine National Authority) : PLO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여 국제연합 옵서버 국가로 인정받으면서 2013년에 팔레스타인의 정부로 바꾸고 독립했다.
[6] 예리코(Jericho) :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 행정 구역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속하며 예리코주의 주도이다
[7]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서울특별시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11번째 교량인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가 붕괴해 일어난 사고이며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1995년 4월 26일에 현대건설이 재건설을 시작하였고 1997년 6월에 완공하여 1997년 7월 3일에 재개통되었다.
*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16일 최초로 준공
1995년 4월 26일에 현대건설이 재건설을 시작하였고 1997년 6월에 완공하여 1997년 7월 3일에 재개통되었다.
*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16일 최초로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