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왕자의 난
대한민국
사건기간 : 1400년, 조회수 : 643, 등록일 : 2020-08-05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이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음으로 방간의 난, 박포의 난 등으로도 불린다.
1차 왕자의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던 박포는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다. 이에 왕위 계승에 야심이 있었던 이방간이 인격, 위세등이 이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이 많자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이방간은 토산현(황해도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난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박포 :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지중추부사(조선의 정2품 관직)가 되었다. 2등 관직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1차 왕자의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던 박포는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다. 이에 왕위 계승에 야심이 있었던 이방간이 인격, 위세등이 이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이 많자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이방간은 토산현(황해도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난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박포 :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지중추부사(조선의 정2품 관직)가 되었다. 2등 관직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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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 또는 '부흥'을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문화·예술·학문·사상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가리킨다. 역사학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지적 혁신의 시기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1453년(116년)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이 계속 싸운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등이 있었다.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서방교회가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분열을 겪었던 혼란의 시기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통일성을 크게 흔들었다.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
정난의 변은 중국 명나라 초기에 일어난 내전으로 명 태조인 [1]주원장(홍무제)이 사망하자 그 손자인 [2]주윤문(건문제)와 그의 숙부 [3]주체(영락제) 사이의 권력 투쟁이었다. 이 사건은 명나라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며 향후 통치 방향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명나라의 태조 [1]주원장(홍무제)은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기 위하여 수 많은 공신을 숙청하고, 자신의 아들 25여명을 병력과 함께 전국 각지의 왕(번왕)으로 봉해 [6]번병으로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황실을 방어하였다. [1]주원장의 4남인 [3]주체는 1370년에 연왕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다.
1392년에 주원장(홍무제)의 장남인 황태자 [4]주표가 갑자기 사망하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주표의 아들이자 주원장의 손자인 [2]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었다.
1398년에 주원장이 사망하자 생전의 지위를 이어받은 [2]주윤문이 명나라 제2대 황제인 건문제로 즉위하였다. 조부인 주원장의 숙청으로 개국공신들이 사라지자 26명이나 되는 자신의 숙부들이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부상하였다.
[2]주윤문(건문제)은 즉위 직후 조부가 세워둔 번왕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5]삭번정책을 단행하였다. 번왕들을 폐위하거나 감금하면서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지방에 독자적인 군권과 재정을 가진 번왕들의 세력이 중앙 통제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지방 안정을 위해 형성된 종친 왕국 체제를 흔들었고 특히 [3]연왕 주체는 생존을 위협을 느끼고 황제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1399년 7월 5일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체의 반란군은 정난군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전쟁 초기는 건문제의 조정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1402년, 정난군은 최종 진격을 감행하여 7월 13일 마침내 수도인 [7]남경을 점령하였다. 정난군이 황궁으로 밀려들자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그의 생사는 영원히 미궁으로 남았다. 궁중에서 불 타 죽었다는 말도 있고 도망쳐 중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승리한 주체는 황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영락으로 고쳤다. 그리고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8]대운하의 정비, [9]정화의 원정 추진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통해 제국의 위신을 강화하면서 명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북경의 자금성도 천도 이후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난의 변에서 자신에게 반대한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각지에서 처형된 자들이 1만 명에 달했다. 이를 "임오순난"이라 한다.
[1] 홍무제 주원장(洪武帝 朱元璋, 1328년 10월 29일 ~ 1398년 6월 24일) : 중국 명나라의 초대황제(재위, 1368년 1월 23일 ~ 1398년 6월 24일). 묘호는 태조(太祖)
[2] 건문제 주윤문(建文帝 朱允炆, 1377년 12월 13일 ~ 1402년) : 명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398년 7월 8일 ~ 1402년 7월 13일). 홍무제의 손자. 묘호는 혜종(惠宗)
[3] 영락제 주체(永樂帝 朱棣,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 : 명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 7월 13일 ~ 1424년 8월 12일). 홍무제의 4남. 연왕(燕王, 재위 : 1370년 5월 2일 ~ 1402년 7월 13일). 묘호는 태종(太宗)-> 성조(成祖)
[4] 주표(朱標, 1355년 10월 10일 ~ 1392년 5월 17일) : 홍무제의 장남. 명나라의 황태자이자 추존황제. 묘호는 흥종(興宗)
[5] 삭번정책(削藩政策) : 명나라 초기에 건문제가 강력해진 제후왕(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 건문제는 삭번 정책을 통해 다섯 명의 제후왕을 제거했다
[6] 번병(藩屛) : 중국의 황실의 안전과 왕조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종친들에게 지방을 분봉하여 군사적·행정적 방어 책임을 맡긴 제도. 이 제도는 "성을 두르고 병풍처럼 지킨다"는 뜻을 가지며, 번(藩)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방어 구역, 병(屛)은 황제를 보호하는 병풍을 의미한다
[7]남경(南京) : 난징. "남쪽의 수도"를 의미하며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초기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였다
[8] 대운하 : 중국 수나라부터 시작되어 원나라 시기에 개수된 대운하를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완성한 사업으로 약 1,800km에 달하는 내륙 수상 운송망
[9] 정화의 원정 :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떠난 해외 탐험 및 항해이다. 이 원정은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유럽의 탐험보다 훨씬 앞선 규모의 항해로 명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조공 관계를 맺는 등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가졌다
명나라의 태조 [1]주원장(홍무제)은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기 위하여 수 많은 공신을 숙청하고, 자신의 아들 25여명을 병력과 함께 전국 각지의 왕(번왕)으로 봉해 [6]번병으로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황실을 방어하였다. [1]주원장의 4남인 [3]주체는 1370년에 연왕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다.
1392년에 주원장(홍무제)의 장남인 황태자 [4]주표가 갑자기 사망하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주표의 아들이자 주원장의 손자인 [2]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었다.
1398년에 주원장이 사망하자 생전의 지위를 이어받은 [2]주윤문이 명나라 제2대 황제인 건문제로 즉위하였다. 조부인 주원장의 숙청으로 개국공신들이 사라지자 26명이나 되는 자신의 숙부들이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부상하였다.
[2]주윤문(건문제)은 즉위 직후 조부가 세워둔 번왕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5]삭번정책을 단행하였다. 번왕들을 폐위하거나 감금하면서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지방에 독자적인 군권과 재정을 가진 번왕들의 세력이 중앙 통제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지방 안정을 위해 형성된 종친 왕국 체제를 흔들었고 특히 [3]연왕 주체는 생존을 위협을 느끼고 황제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1399년 7월 5일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체의 반란군은 정난군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전쟁 초기는 건문제의 조정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1402년, 정난군은 최종 진격을 감행하여 7월 13일 마침내 수도인 [7]남경을 점령하였다. 정난군이 황궁으로 밀려들자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그의 생사는 영원히 미궁으로 남았다. 궁중에서 불 타 죽었다는 말도 있고 도망쳐 중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승리한 주체는 황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영락으로 고쳤다. 그리고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8]대운하의 정비, [9]정화의 원정 추진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통해 제국의 위신을 강화하면서 명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북경의 자금성도 천도 이후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난의 변에서 자신에게 반대한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각지에서 처형된 자들이 1만 명에 달했다. 이를 "임오순난"이라 한다.
[1] 홍무제 주원장(洪武帝 朱元璋, 1328년 10월 29일 ~ 1398년 6월 24일) : 중국 명나라의 초대황제(재위, 1368년 1월 23일 ~ 1398년 6월 24일). 묘호는 태조(太祖)
[2] 건문제 주윤문(建文帝 朱允炆, 1377년 12월 13일 ~ 1402년) : 명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398년 7월 8일 ~ 1402년 7월 13일). 홍무제의 손자. 묘호는 혜종(惠宗)
[3] 영락제 주체(永樂帝 朱棣,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 : 명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 7월 13일 ~ 1424년 8월 12일). 홍무제의 4남. 연왕(燕王, 재위 : 1370년 5월 2일 ~ 1402년 7월 13일). 묘호는 태종(太宗)-> 성조(成祖)
[4] 주표(朱標, 1355년 10월 10일 ~ 1392년 5월 17일) : 홍무제의 장남. 명나라의 황태자이자 추존황제. 묘호는 흥종(興宗)
[5] 삭번정책(削藩政策) : 명나라 초기에 건문제가 강력해진 제후왕(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 건문제는 삭번 정책을 통해 다섯 명의 제후왕을 제거했다
[6] 번병(藩屛) : 중국의 황실의 안전과 왕조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종친들에게 지방을 분봉하여 군사적·행정적 방어 책임을 맡긴 제도. 이 제도는 "성을 두르고 병풍처럼 지킨다"는 뜻을 가지며, 번(藩)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방어 구역, 병(屛)은 황제를 보호하는 병풍을 의미한다
[7]남경(南京) : 난징. "남쪽의 수도"를 의미하며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초기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였다
[8] 대운하 : 중국 수나라부터 시작되어 원나라 시기에 개수된 대운하를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완성한 사업으로 약 1,800km에 달하는 내륙 수상 운송망
[9] 정화의 원정 :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떠난 해외 탐험 및 항해이다. 이 원정은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유럽의 탐험보다 훨씬 앞선 규모의 항해로 명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조공 관계를 맺는 등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