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부정선거
대한민국
사건기간 : 1960년 3월 15일, 조회수 : 531, 등록일 : 2022-04-15
3.15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개표조작이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