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920년 10월 21일~1920년 10월 26일, 조회수 : 241, 등록일 : 2020-07-18
청산리 전투 또는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등을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부대가 간도에서 출병한 일본군을 중화민국 지린성(길림성) 허룽현(화룡현) 청산리(백운평·천수평·완루구)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교전하여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 김좌진(1889년~1930년) : 일제 강점기의 군인, 독립운동가
* 나중소(1867년~1928년) : 일제 강점기의 사관양성소 교성대장, 독립운동가
* 이범석(1900년~1972년) : 일제 강점기의 군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초대 국방부 장관
* 북로군정서 : 1919년 북간도(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에서 결성되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
* 대한독립군 :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 허룽현(화룡현) :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서부에 위치한 조선족 집거지역.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승전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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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허룽현(시)
킬라파트 운동은 영국령 인도의 무슬림들이 전개한 범이슬람주의 저항운동으로, 칼리프 운동 또는 인도 무슬림 운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해체 위기에 처했다. 특히 1920년 세브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축소되고 술탄이자 [1]칼리프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면서 인도 무슬림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인도 무슬림들에게 [1]칼리프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전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구심점이었기에 그 지위가 위협받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 무슬림 사회는 칼리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조직하게 된다. 중심인물로는 모하마드 알리와 샤우카트 알리 형제, 압둘 바라크 등이 있으며, 이들은 영국 정부에 오스만 칼리프 제도의 유지와 회복을 요구했다. [2]킬라파트 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대중 집회를 열었으며 영국 제품 불매운동, 공공직 거부, 교육기관 보이콧 등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킬라파트 운동은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와도 결합되었다. [3]마하트마 간디는 이슬람과 힌두 공동체의 단결을 강조하며 킬라파트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는 킬라파트 운동과 자신의 [4]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결합시켜 전국적인 비폭력 저항 운동을 확산시켰다. 인도의 힌두-무슬림 단결이 역사상 전례 없이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2년 2월 [5]차우리 차우라 사건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간디는 즉각 운동을 중단하였다. 이로 인해 무슬림 사회는 힌두 지도자들의 일관성에 실망했고 킬라파트 운동의 기반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1924년, 튀르키에의 [6]무스타파 케말이 칼리프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함에 따라 킬라파트 운동은 그 목적 자체를 상실하며 종료되었다. 이후 인도 무슬림 정치운동은 점차 분리주의 노선으로 전환되었고, 훗날 파키스탄 분리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킬라파트 운동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 수호 운동을 넘어 인도 내에서 힌두와 무슬림이 공동의 정치 목표를 위해 협력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또한 식민지 체제에 대한 대중의 조직적 저항을 촉진했으며 인도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1] 칼리프(caliph)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최고 종교 권위자의 칭호. 가톨릭의 최고 지위인 교황과 유사하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칼리프를 겸하였다. 아랍어로 칼리파 [2] 킬라파트 위원회(Khilafat Committee) : 1919년 인도에서 결성된 조직으로, 오스만 칼리프의 권위를 보호하고 칼리프 제도의 존속을 촉구하기 위해 활동한 범이슬람 정치 운동의 핵심 기관이었다. 킬라파트 위원회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도 연대하여 힌두와 무슬림의 협력을 기반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는 전국적 비협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3]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 인도의 독립을 이끈 비폭력 저항 운동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 [4] 비폭력 불복종 운동(Satyagraha) : 국가의 법과 제도가 부당하거나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때 자신의 양심에 따라 공객적으로 거부하거나 위반하는 행동을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 한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폭력을 배제한 채 법과 제도에 대한 도덕적 저항 운동을 통해 식민 지배에 맞서는 운동을 말한다 [5] 차우리 차우라 사건(Chauri Chaura Incident) : 1922년 2월, 인도 남부의 차우리 차우라 마을에서 일어났으며 인도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비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경찰의 폭력에 격분하여 경찰서를 방화하고 경찰관 22명을 사망시킨 사건이다 [6]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 ~ 1938년 11월 10일) :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재위, 1923년 10월 29일~1938년 11월 10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연합국(32개국)이 패전국인 동맹국(5개국) 관련하여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렸다. 이 날짜는 1871년 1월 18일에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황제 등극을 선포한 날이었다.
승전국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연맹 창립과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해 오던 미국 대통령 윌슨에 따라 식민지의 독립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러나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체 및 영토분할과 민족 경계를 반영한 국경 재수립등이 이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프랑스 총리 [1]조르주 클레망소, 영국의 수상 [2]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 총리 [3]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미국 대통령 [4]우드로 윌슨이 주도하여 결정을 내렸고, 이후 다른 연합국 대표들은 이를 승인하였다. 이후 이탈리아가 빠지면서 프랑스, 영국, 미국 3개국이 이끌었다.
이 회담으로 패전국가 5개국과 주요 조약이 체결되었다.
-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년 6월 28일) : 독일제국. 국제 연맹의 탄생과 독일 제재에 관한 규정을 포함. 독일은 영토의 13%, 인구의 10% 상실
- 생제르맹 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 1919년 9월 10일) :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선언
- 뇌이 조약(Treaty of Neuilly-sur-Seine, 1919년 11월 27일) :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
-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ianon,1920년 6월 4일) : 헝가리 왕국. 헝가리의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 헝가리는 72%, 인구의 64%상실. 이 조약으로 영토를 얻은 주요 국가는 루마니아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다.
-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 1920년 8월 10일) :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을 해체 선언. 이후 터키는 독립전쟁 승리로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 체결로 현재의 터키 국경을 확보.
트리아농 조약과 세브로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1920년 1월 16일 국제 연맹이 공식출범하고 21일 총회 개회로 파리 강화 회담은 종료되었다.
[1]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년~1929년) :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총리(임기 1906년~1909년, 1917년~1920년). 파리강화회담에서 프랑스의 전권대표로 참석
[2]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년~1945년) : 영국의 제34대 총리(임기 1916년 12월 7일~1922년 10월 22일)
[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Vittorio Emanuele Orlando, 1860년~1952년) : 이탈리아의 총리(임기 1917년 10월 29일~1919년 6월 23일)
[4]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년~1924년) : 미국의 28대 대통령(임기 1913년 3월 4일~1921년 3월 4일)
12세기 무렵부터 끊임없이 영국의 침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1800년 연합법에 의해 영국에 합병된다. 이후 아일랜드는 감자 대기근과 같은 사태를 거치면서 아일랜드 내의 반영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은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기간에 [1]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당시 최신무기로 무장한 16,000명의 영국군을 투입하여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진압되었으며 봉기 지도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부활절 봉기의 영향으로 아일랜드의 민심은 제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 12월에 실시된 총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2]신 페인당은 아이랜드 의석 104석중 73석을 확보했다. 총선거의 결과가 발표된 직후 [2]신 페인당은 영국의회 등원을 거부하고 자체 [3]아일랜드 의회(Dail Eireann)를 구성하고 아일랜드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919년 4월의 두 번째 회의에서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지도자 [4]에이먼 데 발레라(Eamon de Valera)가 내각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임시헌법이 선포되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아일랜드 공화국 승인을 요구했다. 공화국 수립 선언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을 주축으로 한 [5]아일랜드공화국군(Ireland Republican Army)이 창설되었다.
1919년 1월 21일 [5]아일랜드공화국군이 [6]왕립 아일랜드 경찰대의 무기수송대열을 습격해 교전중에 두 명의 영국 경찰이 사망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1921년 7월 휴전에 이르기까지 2년 6개월간 지속되었다.
아일랜드공화국군은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7]마이클 콜린스가 지휘했다. 영국군에 비하여 열세인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주요인물에 대한 선택적 암살과 매복공격, 경찰습격, 무기고 약탈, 주요 정보건물습격등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을 택했다.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경찰은 아일랜드공화국군의 주된 표적이 되었으며, 독립전쟁동안 모두 404명의 [6]왕립 아일랜드 경찰이 피살되었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사기가 저하되고 수세에 몰린 왕립 아일랜드 경찰이 아일랜드공화국군의 게릴라전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자 영국정부는 제대로 규율을 갖추지 못한 제대병사들을 모집해 아일랜드로 보냈다. 이들은 3개월 훈련을 받고 1920년 3월에 처음 아일랜드에 도착한 이들은 짙은 녹색의 아일랜드 경찰제복과는 달리 카키색 군복을 혼용해 입었기 때문에 "블랜 앤 탄스(back & Tans)"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악명을 떨쳤다. 이들의 무자비한 군사 작전과 잔혹한 행위는 아일랜드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응해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영국 본토에서 복수의 유혈극을 시작했다. 리버풀과 런던에서 15곳이 동시에 공격을 받아 5명이 죽었고 많은 주택이 불탔다. 140차례의 방화와 91건의 전신선 절단, 그리고 총격으로 8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영국은 아일랜드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아일랜드 의회는 논란 끝에 65:57표의 7표차로 1922년 1월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인준한다. 이로써 아일랜드자유국(Irish Free State)이 성립되었고, 아일랜드는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영국의 오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독립은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후 아일랜드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독립을 위해 함께 피를 흘렸던 동지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으며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북아일랜드와 분리되면서 아일랜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 더블린(Dublin) : 아일랜드 수도
[2] 신 페인(Sinn Féin) : 아일랜드 독립을 이끌어왔던 정당
[3] 아일랜드 의회(Dail Eireann) :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선언이 있었던 1919년 창설된 아일랜드 의회
[4] 에이먼 데 벌레라(Éamon de Valera, 1882년~1975년) : 아일랜드의 정치인. 아일랜드공화국 대통령(1921~1922),아일랜드 총리(1951~1954, 1957~1959), 아일랜드의 3대 대통령(1959~1973)
[5]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 :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마이클 콜린스등 아일랜드 독립군 세력이 결성하였다. 현 아일랜드 국방군의 전신
[6]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oyal Irish Constabulary, RIC) : 영국이 아일랜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파견한 경찰조직으로 아일랜드 전역에 총 9,700여 명의 인원과 1,500여개의 병영이 있었다
[7] 마이클 존 콜린스(Michael John Collins, 1890년~1922년) : 아일랜드의 혁명지도자, 정치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서 부관감, 방첩대장, 군사조직 및 무기조달 담당자 등의 중책을 맡았고,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단장이었다. 영국-아일랜드 조약 당시 조약 찬성파에 섰으며, 임시정부 주석이자 아일랜드 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아일랜드 내전중인 1922년 8월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ATIRA)에게 습격당해 사살되었다
홍범도를 필두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펑우동(봉오동)에서 일본군인 월강 추격대대와 교전한 사건이다.
봉오동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역사적인 첫 승리로 기록되었다.
* 대한북로독군부 : 1920년 5월 28일 북간도의 항일 무장 독립군 단체들이 연합해 성립된 단체
* 대한독립군 : 1919년 홍범도를 중심으로 북간도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
* 홍범도(1868년~1943년) :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의 군인, 독립운동가
* 허룽현(화룡현) :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서부에 위치한 조선족 집거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