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876년 2월 27일, 조회수 : 160, 등록일 : 2020-07-07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는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으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불린다.
이 조약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1]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교전한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자주국으로 규정(제1조)하여 청과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부정하였다. 둘째, 부산항 외에 인천과 원산을 개항하여 일본 상인과 선박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였다. 셋째,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치외법권(제10조)을 인정하여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영사 재판권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였다. 넷째, 일본은 조선 연안에서의 측량권을 획득하여 군사·지리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일수호조규는 형식상 양국 간의 수호·통상 조약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경제적·군사적 침투를 합법화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근대적 국제조약 체제에 편입되는 동시에 외세의 압력과 침탈에 직접 노출되는 계기를 맞이하였고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로 이어지는 문호 개방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리틀빅혼 전투는 미국 몬태나 주의 [1]리틀빅혼 강 인근에서 벌어진 미국 정부와 원주민 부족 간의 갈등 중 가장 격렬하고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7]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의 지휘 하의 미 육군 [8]제7기병대와 [3]라코타 수족, [4]북부 샤이엔족, [5]아라파호족 연합 부족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이었다.
미국 정부는 19세기 중반 서부로 영토 확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부족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나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 충돌을 완화하고 백인 이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6]포트 라래미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868년에 체결된 [6]포트 라래미 조약에서 블랙힐스 지역은 라코타족의 영구 영토로 보장하였다.
블랙힐스는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와 와이오밍주에 걸쳐 있는 산악 지역으로 대평원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독특한 지리적·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이 지역은 [3]라코타 수족에게 신성한 영토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종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874년에 이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백인 탐광꾼들이 몰려들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였다. 이로 인해 라코타를 비롯한 부족들은 조약 위반에 반발하며 무장 저항에 나섰다. 이로 인해 라코타 부족과 미국 정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블랙힐스는 원주민 권리와 토지 반환 문제의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7]커스터 중령은 1876년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원주민 무장 해제 작전에 참여하며 [8]제7기병대 병력 600여명을 이끌고 라코타 연합부족이 집결한 것으로 알려진 [1]리틀빅혼 강 주변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합 부족의 병력 규모를 과소평가한 채 기병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시도하였다. 연합부족의 병력은 약 2,000명에서 2,500명이었다.
커스터 중령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약 210명의 부대를 중심으로 강 동쪽에서 부족 진영을 공격하였으며 나머지 병력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지원 작전을 수행하도록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 병력 분할은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분산된 부대들은 개별적으로 공격받으며 효과적으로 협력하지 못했다.
특히 커스터가 이끈 부대는 라코타 수족 [2]오글라라 부족의 지도자인 [9]크레이지 호스와 [2]흐눈파파 부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10]시팅 불이 이끄는 부족 전사들에게 포위되었다. 시팅 불은 전투 직전 대규모 영적 의식을 통해 부족의 사기를 끌어올렸고 크레이지 호스는 실전 지휘를 맡아 빠르고 유동적인 기병 전술로 미군을 압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커스터와 약 210명의 병력이 전멸당하였으며 다른 부대도 고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머지 한 부대는 제 때 도착하지 못해 지원에 실패하였다.
리틀빅혼 전투는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는 원주민들에게는 큰 영광의 승리였으나 미국 정부는 더욱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단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원주민 부족들은 점차 군사적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1877년 이후 크레이지 호스는 항복하였고 시팅 불은 캐나다로 망명하였다가 식량 부족과 혹독한 환경, 그리고 캐나다 정부와 미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 생존이 어려워지자 결국 미국 군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원주민들이 지속적인 저항을 이어가기에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리틀 빅혼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커스터의 최후(Custer’s Last Stand)"로 불리며 미국 내에서 원주민 문제, 군사 전략 실패,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 현재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리틀 빅혼 전적 국립기념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 리틀빅혼(Little Bighorn) : 미국 몬태나주 남부에 위치한 지역. 이 지역은 현재 "리틀빅혼 전적지 국립기념지(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어 있다. 방문객들이 당시 전투의 경로와 주요 지점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배경을 배울 수 있는 교육 및 추모의 장소로 보존되어 있다 [2] 수족(Lakota) : 북미 원주민인 수(Sioux) 계열 부족 가운데 하나로 가장 영향력 있던 부족 중 하나다. 라코타는 7개의 하위 부족으로 나뉘며 대표적으로 오글라라(Oglala), 흐눈파파(Hunkpapa), 미니코우주(Minicoujou) 등이 있다. [3] 라코타 수족(Lakota Sioux) : 북아메리카에서 활동한 수(Sioux) 계열의 대표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다. 이들은 원래 중서부 지역에서 살다가 17세기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몬태나, 와이오밍 등지의 대초원 지대에 정착하였다. [4] 샤이엔(Cheyenne)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북부 샤이엔(Northern Cheyenne)과 남부 샤이엔(Southern Cheyenne)으로 나뉘며 각각 몬태나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에 거주한다. 이들은 복잡한 전사 사회 체계와 의회 형태의 부족 정치 제도, 태양춤(Sun Dance) 같은 종교 의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래는 미네소타 지역의 삼림 지대에서 농업과 수렵을 하며 살았지만 18세기 이후 말과 총기의 도입을 계기로 서부로 이동하여 기마 유목 문화를 발전시켰다. [5] 아라파호(Arapaho)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현재는 주로 와이오밍(Wyoming)과 오클라호마(Oklahoma)에 거주한다. 본래는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농경을 하며 살았으나 말의 도입 이후 18세기경 대평원으로 이동하여 기마 수렵 생활을 하게 되었다. [6] 포트 라래미 조약(Fort Laramie Treaty) : 미국 정부와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체결된 두 차례의 조약으로 각각 1851년과 1868년에 와이오밍주의 포트 라래미에서 조인되었다. 1851년의 첫 조약은 라코타 수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크로우족 등 여러 부족의 전통적인 영토를 미국 정부가 인정하고 정착민들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부족 간 경계 설정이 불명확했고, 미국 측이 조약을 자주 위반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1868년의 두 번째 조약은 라코타 수족을 중심으로 체결되었으며 블랙힐스를 포함한 광범위한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미국의 요새 철수 및 정착민 출입 금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자 미국은 이를 일방적으로 점령하고 조약을 위반했으며 이로 인해 라코타족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876년의 리틀빅혼 전투이다. [7]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1839년 11월 11일 ~ 1876년 6월 25일) : 미국 남북전쟁과 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기병 장교이다. 남북전쟁 중에 장군으로 임시 승진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정규군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중령으로 강등되었다. 그는 리틀빅혼 전투에서 무리한 병력 분산과 과감한 공격으로 전멸당하며 전사했다. [8] 제7기병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정규 기병 연대 중 하나로 1866년에 창설되었다. 주로 미국 서부 개척과 인디언 전쟁 시기에 활약하였다. 이후 미서전쟁,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미 육군의 기계화 보병 부대로 존재하고 있다. [9]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1840~1877년 9월 5일) : 일명 미친말. 원주민 언어의 이름은 타슝카 위트코(Tȟašúŋke Witkó). 19세기 후반 수족(Lakota) 부족내 오글라라족의 유명한 전사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미국 정부의 서부 확장과 원주민 영토 침범에 강력히 저항한 인물로 미국-인디언 전쟁에서 게릴라 전술을 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오늘날 그는 미 원주민 저항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며 사우스다코타 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크레이지 호스 기념 조각상이 건립 중이다. [10] 시팅 불(Sitting Bull, 1831년 경 ~ 1890년 12월 15일) : 일명 앉은황소. 원주민 언어의 이름은 타탕카 이요탕카(Tȟatȟáŋka Íyotake). 라코타족내의 흐눈파라(Hunkpapa Lakota)의 지도자이자 전사였다. 미국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과 평화조약 위반에 끝까지 저항한 상징적인 인물로 미국-인디언 전쟁 기간 동안 라코타, 샤이엔, 아라파호 연합 부족의 단결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