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사건기간 : 1854년 3월 31일, 조회수 : 614, 등록일 : 2020-06-25
미일화친조약은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이 쇄국 정책을 끝내고 서구 국가들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시작한 사건이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미국 선박이 조난당한 경우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약 220년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종식했으며 서구 열강과 조약이 연이어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진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 경유지를 확보하였으며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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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California Gold Rush)는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근교인 콜로마(Coloma)라는 마을의 제재소(Sutter's Mill)에서 일하던 제임스 마셜(James W. Marshall)이 아메리칸 리버(American river)에서 금가루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말기의 사회적·경제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제국의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동안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자 종교 혁명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여기에 영국, 프랑스, [1]사르데냐 왕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충돌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흑해와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령 [2]다뉴브 공국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며 개입을 시도했고,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피의 캔자스는 미국역사에서 '피로 물든 캔자스(Bloody Kansas) 혹은 경계지역의 전쟁(Border War)'라고 언급된다.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