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사건기간 : 1990년 10월 3일, 조회수 : 193, 등록일 : 2020-06-14
독일의 재통일(독일어:Deutsche Wiedervereinigung)은 1990년 10월 3일에 과거 독일 민주 공화국(German Democratic Republic, 동독)에 속하던 5개주가 독일 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 서독)에 가입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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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전쟁은 두나라간의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독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으로서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나 이후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한 분쟁이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오전 2시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쿠웨이트를 점령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는 국제적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을 편성하여 이라크를 제재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국제연합은 이라크에 쿠웨이트 합병 철회와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의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작전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와 미군 군사 기지 설치하였다.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거부하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의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 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이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년~현존)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재위 : 2001년~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