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국사건기간 : 1951년 5월 16일~1951년 5월 22일 , 조회수 : 413, 등록일 : 2020-06-10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현리에서 중공군과 조선인민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대공세로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해 당시 유재흥이 지휘하던 대한 육군 제3군단은 현리에서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에 따라 3군단 전체 병력이 분산, 와해된 상태로 후퇴하여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하진부리에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는데 결과 병력의 30%와 장비의 70%를 잃었으며 한국군 장성의 작전지휘 능력은 철저하게 불신받게 되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1892~1992) 미8군 사령관은 한국군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으며, 1군단 또한 미군 사령부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도록 해 육군본부를 지휘선 상에서 제외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이다.
* 현리 :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 오마치고개 :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 31번 국도상의 고개. 현재도 인제, 현리와 후방의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며 당시에는 3군단 유일의 후방 보급로상의 주요 거점 이었다.
* 하진부리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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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종전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했으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재건하려 했고, [2]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인 [3]베트민은 독립을 위해 싸웠다. 베트남 독립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등으로 불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의 [2]호찌민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5]하이퐁 항구를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4]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하노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2]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1]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는 재정문제와 내부의 반발과 비판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4년 5월 7일 [6]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면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통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월남)과 베트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월맹)으로 나눠졌으며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1] 인도차이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렸다 [2]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1911년~2013년) : 베트남의 장군이자 정치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까지 승리를 이끈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 [5] 하이퐁(Hai Phong) : 베트남 동북부의 항구 도시 [6]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교통을 차단하고자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베트민의 포위공격에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하여 1954년 9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제주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 사건이자 현대 한국사의 대표적인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분쟁이 아니라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과 냉전 구도의 심화, 좌·우익 세력 간의 갈등,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강경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발생하였다.
1947년 3월 1일 기념식에서 [1]남조선로동당계열 군중이 미군정 통치반대등을 내세워 시위을 했다. 이를 진압하던 경찰의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여 이를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고 경찰과 우익 단체, 그리고 미군정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증폭되었다.
1948년 5월로 예정된 남한 단독 총선거 일정이 발표되자 [1]남로당은 2월 7일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고, 이 파업중 일부가 과격화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으로 이어졌다.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선거(5·10 총선거)에 반대며 경찰지서와 우익 단체를 기습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장 봉기는 정부의 군사·경찰을 증파하고 [2]서북청년회를 투입함으로써 강력한 진압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무장대뿐만 아니라 무관한 민간인들까지도 학살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무장대 소탕을 위하여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6]중산간 지역을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다. 마을 단위로 [7]소개령을 내려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키고, 입산자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는 무차별적으로 처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여성과 어린이, 노인까지도 처형당했다. 또한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으며 그 와중에도 무차별적인 체포와 고문, 즉결처분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학살은 군경토벌대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무장대들은 해안마을을 습격하여 경찰가족과 우익인사를 살해했다. 그 와중에 무고한 주민들도 상당수 희생되었다. 복수와 증오심. 복수는 복수를 낳았고 증오는 격한 충돌로 이어져 민간인들의 희생은 극에 달했다(제주 4·3평화재단 )
1950년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3]예비검속의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또한 4·3 사건 관련으로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도 희생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4]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오랜 기간 동안 이념 대립과 정치적 이유로 인해 공론화되지 못하고 "금기의 역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마침내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000년에 시행되아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와 희생자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2003년 10월에는 [5]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로서 공식 사과를 발표하여 국가 폭력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는 9,688명, 행방불명자는 4,255명, 수형자 335명, 후유장애자는 164명으로 조사됐다. 사망자 중 7,624명(78.7%)은 토벌대에 의해, 1,528명(15.7%)은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3,019명(20.9%)은 여성, 11,423명(79.1%)는 남성이었다. 2,089명(14.5%)은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 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84-89p).
제주 4·3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비극을 넘어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겪어야 했던 이념 갈등과 국가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평화와 인권, 화해의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매년 4월 3일에는 제주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다.
제주 4·3 사건은 2025년 4월 11일에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조] 제주 4·3 사건 : https://jeju43peace.or.kr/kor/sub01_01_01.do - 제주 4·3 평화재단
[1]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 : 줄여서 남로당은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되어 대중 정당을 지향했으나 결국에는 공산당이 되었다. 당대표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었다 [2]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Northwest Youth Association) : 미군정당시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극우 성향의 청년단체. 1946년 11월30일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설립한 우익청년단체.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3] 예비검속(豫備檢束) : 법원의 영장없이 의심되는 인물을 구금하거나 체포하여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목적의 조치 [4] 금족(禁足)지역 : 제주 4·3 사건 당시 군사 작전과 진압 활동으로 인해 일반인 접근이 통제되었던 지역을 지칭하며 1954년 9월 21일에 전면 개방될 때까지 약 7년 동안 지속되었다 [5]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2009년 5월 23일)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6] 중산간지역 : 한라산 정상보다 낮고 해안선보다는 높은, 해발고도 약 200~600m 사이의 지역 [7] 소개령(疏開令) : 공습이나 화재 등 재난 상황에서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 물자,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명령
세계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후 한반도는 일제강점기 시기에서 해방을 맞았으나 외세의 개입으로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하였다.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의 기습으로 남한은 3일만에 수도 서을을 빼앗겼으며 북한군은 여세를 몰아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유엔결의에 의해 유엔군이 조직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7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남으로 계속 밀린 남한군과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였다.
9월 15일 새벽 유엔군의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아래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6일에 서울에 진입하였고 9월 29일에는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과 남한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 북상하였다. 유엔군은 11월 21일에 압록강 연안까지 북진하였으나 11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에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한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되었다.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나면서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여러차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간헐적인 사건 및 전투는 계속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종료되고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김일성(1912년~1994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 * 유엔군(United Nations Command, UNC)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한국전쟁을 계기로 선립된 다국적군 사령부. 현재 대한민국에 주둔 중인 다국적 연합군 부대를 가리킨다.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964년) : 한국전쟁당시 UN군 총사령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 * 한국전쟁 참전국 : 미국,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터키,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디오피아, 콜롬비아
설마리 전투는 글로스터 고지 전투 또는 임진강 전투로도 불린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1월 4일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3월에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8도선을 다시 탈환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70만 명의 병력을 둥원하여 [1]춘계 대공세를 개시하여 임진강 방면과 철원, 포천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엔군은 서울 북방을 방어선으로 삼고 공세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특히 철원으로 통하는 요충지인 설마리 일대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설마리를 돌파당할 경우 중공군은 수도권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게 되므로 반드시 지켜내야 할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방어를 맡은 것은 국군 제6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2]글로스터셔 대대였다. 그들은 열세한 병력과 화력에도 불구하고 수십 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하게 항전하였다. 전투는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이어졌는데 글로스터셔 대대는 포위망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였다.
4월 22일 전투는 시작되어 4월 24일까지 격전에서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탄약은 거의 소모되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에서도 대대는 그날 밤 연속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하였으며 4월 25일 아침까지 진지를 고수하였다.
전투의 결과로 글로스터 대대는 59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26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180명의 부상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3년간의 포로수용소에서 34명이 사망하였다. 국군 제6사단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설마리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공세가 지연되었고 유엔군은 한강 이북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재편하였다. 이후 중공군 공세의 추진력이 꺾이면서 중단되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1953년 포로교환협정에 의해 석방되었다.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치른 대표적인 전투 중의 하나로 가장 성공적인 고립방어의 전투로 기록되었다. 1957년에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에 영국군 참전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이후 매년 합동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영국 [3]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설마리 전투비를 다녀갔다. 영국인들은 이 고지를 글로스터 고지(Gloster Valley)라 부른다.
[1] 춘계공세(Chinese Spring Offensive) : 중공군 제5차 공세로 1951년 4월 하순에 실시한 중국인민지원군이 수행한 군사 작전으로 총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에게 다시 빼앗긴 서울의 재점령과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 영국 글로스터셔 대대(Gloucestershire regiment) : 영국 남서부에 있는 글로스터셔 지역의 이름으로 1694년에 창설되었으며 180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이집트를 상징하는 부대마크를 사용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때 워털루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1차대전, 2차대전은 물론 버마전투, 이집트전투등 영국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출처 : 아틀라스 뉴스] [3]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년 4월 21일~2022년 9월 8일) : 영국과 영연방 왕국 윈저 왕조의 제4대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