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1차 고려 침공
대한민국
사건기간 : 1359년 12월~1360년 2월, 조회수 : 455, 등록일 : 2020-06-10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의 의주·정주·인주·철주의 4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까지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하여 서경 탈환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홍건적을 압록강까지 물리쳤다.
* 공민왕 : 고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 서경(西京)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중 3경(서경,개경,동경 혹은 서경,개경,남경)중 하나이다. 현재의 평양이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하여 서경 탈환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홍건적을 압록강까지 물리쳤다.
* 공민왕 : 고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 서경(西京)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중 3경(서경,개경,동경 혹은 서경,개경,남경)중 하나이다. 현재의 평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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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 또는 '부흥'을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문화·예술·학문·사상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가리킨다. 역사학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지적 혁신의 시기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던 교황청이 프랑스 [1]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르게 한 사건이다.
프랑스 국왕 [2]필리프 4세와 교황 [3]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으로 1309년 9월 7일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다. 필리프 4세의 심복인 [4]기욤 드 노가레에게 치욕을 당한 후 심한 충격으로 한달만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1305년 새 교황에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즉위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로마는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 필리프 4세의 지원이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아비뇽유수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뇽에서 7명의 교황이 생활하였으며 다음과 같다
교황 클레멘스 5세(Papa Clemente V,1305년-1314년) : 제195대 교황(재위: 1305년 11월 14일~1314년 4월 20일)
교황 요한 22세 (Papa Giovanni XXII, 1316년-1334년) : 제196대 교황(재위: 1316년 8월 7일~1334년 12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 (Papa Benedetto XII, 1334년-1342년) : 제197대 교황(재위: 1334년 12월 30일~1342년 4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6세 (Papa Clemente VI, 1342년-1352년) : 제198대 교황(재위: 1342년 5월 7일~1352년 12월 6일)
교황 인노첸시오 6세 (Papa Innocenzo VI, 1352년-1362년) : 제199대 교황(재위: 1352년 12월 18일~1362년 9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5세 (Papa Urbano V, 1362년-1370년) : 제200대 교황(재위: 1362년 9월 28일~1370년 12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Papa Gregorio XI, 1370년-1378년) : 제201대 카톨릭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1378년 3월 27일).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이 크게 약화한 상징적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정통성을 두고 대립하며 교회는 대분열 시대를 맞고 권위를 실추한다.
[1] 아비뇽(Avignon) :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에 속한 도시
[2]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3]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1303년)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4]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프랑스 국왕 [2]필리프 4세와 교황 [3]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으로 1309년 9월 7일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다. 필리프 4세의 심복인 [4]기욤 드 노가레에게 치욕을 당한 후 심한 충격으로 한달만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1305년 새 교황에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즉위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로마는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 필리프 4세의 지원이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아비뇽유수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뇽에서 7명의 교황이 생활하였으며 다음과 같다
교황 클레멘스 5세(Papa Clemente V,1305년-1314년) : 제195대 교황(재위: 1305년 11월 14일~1314년 4월 20일)
교황 요한 22세 (Papa Giovanni XXII, 1316년-1334년) : 제196대 교황(재위: 1316년 8월 7일~1334년 12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 (Papa Benedetto XII, 1334년-1342년) : 제197대 교황(재위: 1334년 12월 30일~1342년 4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6세 (Papa Clemente VI, 1342년-1352년) : 제198대 교황(재위: 1342년 5월 7일~1352년 12월 6일)
교황 인노첸시오 6세 (Papa Innocenzo VI, 1352년-1362년) : 제199대 교황(재위: 1352년 12월 18일~1362년 9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5세 (Papa Urbano V, 1362년-1370년) : 제200대 교황(재위: 1362년 9월 28일~1370년 12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Papa Gregorio XI, 1370년-1378년) : 제201대 카톨릭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1378년 3월 27일).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이 크게 약화한 상징적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정통성을 두고 대립하며 교회는 대분열 시대를 맞고 권위를 실추한다.
[1] 아비뇽(Avignon) :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에 속한 도시
[2]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3]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1303년)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4]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1453년(116년)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이 계속 싸운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등이 있었다.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