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사건기간 : 1965년 9월 30일~1965년 10월 1일, 조회수 : 419, 등록일 : 2020-06-07
1965년 9월 30일 [3]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의 최고 군 장군 6명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리고 [2]수카르노의 수호자라고 선언했다. 처형 이후 자카르타의 메르데카 광장과 대통령궁을 점거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그당시 육군전략사령관이었던 [1]수하르토에 의해 진압돼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수하르토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친 [2]수카르노 인사등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년간 독재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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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1954년 제네바 협정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일단 양분되었고, 17도 이북에는 [4]호치민이 이끄는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수립되고, 17도 이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5]응오 딘 지엠 정권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또는 월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인도네시아 대학살은 1965년 9월 30일 [3]인도네시아 공산당 쿠데타 미수로 인한 반등으로 반공주의의 기치아래 공산당 구성원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2]수카르노가 실각되고 그 뒤를 이어 [1]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면서 30년 독재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 및 재정지원 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부정하고 있다.
학살은 1965년 10월 수도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중부 및 동부 자바섬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 후 발리섬에서도 지역 자경단과 육군부대가 실제 공산당회원과 공산당 회원으로 추정되면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잔학 행위는 당시 육군 [1]수하르토 휘하의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쿠데타 미수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체에 누적된 공동체적 긴장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육군지도부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악당으로 규정했으며, 반공주의에 고취된 민간인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1]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여년간 지속된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1965년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언급자체가 금기시되었다. 2008년 1월 27일 숨을 거둔 수하르토는 끝내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어느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중부 고원 지방 이아 드랑 계곡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벌인 첫 정규 전투이다.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기병사단 공중 강습([3]헬리본) 부대를 착륙시켰다.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대포 폭격으로 큰 희생을 내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과 저항으로 미군은 [4]브로큰 애로우 상황에 빠지고 만다. 결국 미군은 [2]UH-1 [2]건쉽의 무차별 공격으로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전투 결과 북베트남군의 전사자는 1,500명 이상이며 미군은 약 300여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비율이 6대1수준으로 이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지리적 특성으로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저(We Were Soldiers)'영화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1] UH-1 : 미국의 '벨 헬리콥터'사가 제작한 다목적 헬리콥터(utility helicopter) [2] 건쉽(gunship) : 포를 지닌 배를 가리키지만 육군에서는 공격헬기를 지칭 [3] 헬리본(heliborne) : 헬리콥터 공중 강습 [4]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 진지나 거점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부대가 괴멸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