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Renaissance)
전국가
사건기간 : 1300년경~1600년경, 조회수 : 242, 등록일 : 2020-06-06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 또는 '부흥'을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문화·예술·학문·사상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가리킨다. 역사학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지적 혁신의 시기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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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 사건은 중세 유럽에서 교황권과 세속 왕권 사이의 갈등으로 당시 로마교황 [1]보니파시오 8세가 이탈리아 [2]아나니에서 체포·굴욕을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왕 [3]필리프 4세와 교황 사이의 장기적 대립의 결과였으며 교황권의 정치적 위상을 약화시키고 이후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존재하면서 양측이 모두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는 약 40여 년간 지속된 [4]서방 교회 대분열의 국면에 들어섰으며 교황권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프랑스 [3]필리프 4세는 왕권 강화와 재정 조달을 위해 1295년에 면세의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에도 과세를 부여하고 교황권의 간섭 최소화를 추진했다. 이에 대해 교회의 권위와 교구로부터 들어오는 자금으로 운영되던 교황청 입장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1]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청의 동의없이 성직자가 세금을 낼 수 없으며 세금을 내는 주교는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1302년에 교황이 세속 권위보다 절대적인 우월권을 가진다라고 하는 [5]우남상탐을 발표하였다.
반포한 교황 교서들은 프랑스 왕권과 직결된 문제를 일으켰고, 두 권력은 점차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또한 보니파시오 8세는 내부적으로 [6]카에타니가문에 속하는 강력한 파벌로서 로마 귀족 가문들과도 대립을 빚었다. 이 같은 정치·법적·가문적 대립이 복합적으로 얽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필리프 4세는 [7]삼부회를 소집하여 동의를 얻은 후 보니파시오 8세의 간통죄, 부정부패, 살인죄등을 들어 고발하는 기소장을 작성하여 1303년 9월 초에 법률 고문 겸 장관 겸 사절였던 [8]기욤 드 노가레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오랜 원한이 있던 로마의 [9]콜론나 가문의 시욘나 콜론나가 지휘하는 군대를 이끌고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의 [2]아나니를 급습해 교황이 머물던 주교 건물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보니파시오 8세의 구금과 심문을 통해 그를 프랑스로 압송하거나 교회회의에 회부해 퇴위를 강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 "아나니의 뺨(schiaffo)" 즉 시요나 콜로나가 교황의 얼굴을 때렸다는 일화이다. 현지와 후대의 기록은 이 "뺨 때리기" 이야기를 전하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지에 대해 신중하다. 일부 기록은 물리적 구타를 증언하나, 다른 연구들은 그것을 심대한 모욕 또는 정치적 굴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실제로 손으로 때렸는지 여부는 출처에 따라 다르며, 사건 자체가 교황에 대한 공개적 모욕과 구금·학대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Encyclopedia Britannica)
아나니 시민과 주변 세력의 반발로 며칠 뒤에 보니파시오 8세는 풀려났으나, 이 사건으로 심신이 크게 상한 그는 한달 후인 10월 11일 사망했다. 뒤이은 교황 선출 과정의 불안은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을 키웠고, 결국 1305년 [10]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어 교황청이 점차 프랑스 쪽으로 기운 끝에 1309년경부터 아비뇽으로 옮겨 장기간 체류하는 [11]아비뇽 유수로 이어지면서 서방 교회의 대분열로 교황권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1]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 1303년 10월 11일)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1303년 10월 11일)
[2] 아나니(Anagni) : 로마 동남동쪽 구릉지 라티움(Latium, 이탈리아 반도 중부 서안에 위치한 곳)의 프로시노네 도시에 있는 코무네(이탈리아의 행정 구역으로 도 아래에 있는 기초 지방 자치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고향이자 별장이 있는 곳이다
[3]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11월 29일)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를 개최했다
[4] 서방 교회 대분열(Magnum schisma occidentale, 1378년~1417년) : 아비뇽 유수로 인하여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의 아비뇽에 두개의 교황청과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면서 서방교회가 분열하고 서유럽 전역에 걸쳐 대혼란이 일어났던 시기
[5] 우남 상탐(Unam Sanctam) :교황 보니파치오 8세가 1302년 11월 18일 반포한 교황 칙서이며 중세 교황권의 권위-주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문헌중 하나이다. 이 칙서는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에 관해 교황의 우위(특히 영적 권위가 세속 권위보다 상위에 있다는 주장)를 강하게 주장했다
[6] 카에타니(Caetani) 가문 : 중세·르네상스 시기의 로마 및 이탈리아 중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귀족 가문. 교황 보니파치오 8세를 배출한 귀족 가문으로 중세 말 교황권과 세속 권력의 대립 속에서 중요한 정치적·교회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 특히 교황과 깊은 연관을 맺었으며 로마와 주변 지역의 권력 다툼에 깊숙이 관여했다
[7]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8]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9] 콜론나 가문(Colonna) : 르네상스 시대 로마에서 세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교황과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군대까지 동원하여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역을 공격했다. 가문의 영지와 재산은 몰수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나머지 일족들은 이탈리아 밖으로 달아났다
[10] 클레멘스 5세(Papa Clemens V) : 제195대 교황.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의 강한 압력으로 선출되었다. 아비뇽 유수 및 아비뇽 교황 시대를 열었다
[11] 아비용 유수(Avignon Papacy) :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던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하게 된 사건
프랑스 [3]필리프 4세는 왕권 강화와 재정 조달을 위해 1295년에 면세의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에도 과세를 부여하고 교황권의 간섭 최소화를 추진했다. 이에 대해 교회의 권위와 교구로부터 들어오는 자금으로 운영되던 교황청 입장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1]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청의 동의없이 성직자가 세금을 낼 수 없으며 세금을 내는 주교는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1302년에 교황이 세속 권위보다 절대적인 우월권을 가진다라고 하는 [5]우남상탐을 발표하였다.
반포한 교황 교서들은 프랑스 왕권과 직결된 문제를 일으켰고, 두 권력은 점차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또한 보니파시오 8세는 내부적으로 [6]카에타니가문에 속하는 강력한 파벌로서 로마 귀족 가문들과도 대립을 빚었다. 이 같은 정치·법적·가문적 대립이 복합적으로 얽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필리프 4세는 [7]삼부회를 소집하여 동의를 얻은 후 보니파시오 8세의 간통죄, 부정부패, 살인죄등을 들어 고발하는 기소장을 작성하여 1303년 9월 초에 법률 고문 겸 장관 겸 사절였던 [8]기욤 드 노가레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오랜 원한이 있던 로마의 [9]콜론나 가문의 시욘나 콜론나가 지휘하는 군대를 이끌고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의 [2]아나니를 급습해 교황이 머물던 주교 건물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보니파시오 8세의 구금과 심문을 통해 그를 프랑스로 압송하거나 교회회의에 회부해 퇴위를 강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 "아나니의 뺨(schiaffo)" 즉 시요나 콜로나가 교황의 얼굴을 때렸다는 일화이다. 현지와 후대의 기록은 이 "뺨 때리기" 이야기를 전하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지에 대해 신중하다. 일부 기록은 물리적 구타를 증언하나, 다른 연구들은 그것을 심대한 모욕 또는 정치적 굴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실제로 손으로 때렸는지 여부는 출처에 따라 다르며, 사건 자체가 교황에 대한 공개적 모욕과 구금·학대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Encyclopedia Britannica)
아나니 시민과 주변 세력의 반발로 며칠 뒤에 보니파시오 8세는 풀려났으나, 이 사건으로 심신이 크게 상한 그는 한달 후인 10월 11일 사망했다. 뒤이은 교황 선출 과정의 불안은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을 키웠고, 결국 1305년 [10]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어 교황청이 점차 프랑스 쪽으로 기운 끝에 1309년경부터 아비뇽으로 옮겨 장기간 체류하는 [11]아비뇽 유수로 이어지면서 서방 교회의 대분열로 교황권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1]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 1303년 10월 11일)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1303년 10월 11일)
[2] 아나니(Anagni) : 로마 동남동쪽 구릉지 라티움(Latium, 이탈리아 반도 중부 서안에 위치한 곳)의 프로시노네 도시에 있는 코무네(이탈리아의 행정 구역으로 도 아래에 있는 기초 지방 자치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고향이자 별장이 있는 곳이다
[3]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11월 29일)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를 개최했다
[4] 서방 교회 대분열(Magnum schisma occidentale, 1378년~1417년) : 아비뇽 유수로 인하여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의 아비뇽에 두개의 교황청과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면서 서방교회가 분열하고 서유럽 전역에 걸쳐 대혼란이 일어났던 시기
[5] 우남 상탐(Unam Sanctam) :교황 보니파치오 8세가 1302년 11월 18일 반포한 교황 칙서이며 중세 교황권의 권위-주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문헌중 하나이다. 이 칙서는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에 관해 교황의 우위(특히 영적 권위가 세속 권위보다 상위에 있다는 주장)를 강하게 주장했다
[6] 카에타니(Caetani) 가문 : 중세·르네상스 시기의 로마 및 이탈리아 중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귀족 가문. 교황 보니파치오 8세를 배출한 귀족 가문으로 중세 말 교황권과 세속 권력의 대립 속에서 중요한 정치적·교회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 특히 교황과 깊은 연관을 맺었으며 로마와 주변 지역의 권력 다툼에 깊숙이 관여했다
[7]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8]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9] 콜론나 가문(Colonna) : 르네상스 시대 로마에서 세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교황과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군대까지 동원하여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역을 공격했다. 가문의 영지와 재산은 몰수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나머지 일족들은 이탈리아 밖으로 달아났다
[10] 클레멘스 5세(Papa Clemens V) : 제195대 교황.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의 강한 압력으로 선출되었다. 아비뇽 유수 및 아비뇽 교황 시대를 열었다
[11] 아비용 유수(Avignon Papacy) :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던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하게 된 사건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던 교황청이 프랑스 [1]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르게 한 사건이다.
프랑스 국왕 [2]필리프 4세와 교황 [3]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으로 1309년 9월 7일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다. 필리프 4세의 심복인 [4]기욤 드 노가레에게 치욕을 당한 후 심한 충격으로 한달만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1305년 새 교황에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즉위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로마는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 필리프 4세의 지원이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아비뇽유수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뇽에서 7명의 교황이 생활하였으며 다음과 같다
교황 클레멘스 5세(Papa Clemente V,1305년-1314년) : 제195대 교황(재위: 1305년 11월 14일~1314년 4월 20일)
교황 요한 22세 (Papa Giovanni XXII, 1316년-1334년) : 제196대 교황(재위: 1316년 8월 7일~1334년 12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 (Papa Benedetto XII, 1334년-1342년) : 제197대 교황(재위: 1334년 12월 30일~1342년 4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6세 (Papa Clemente VI, 1342년-1352년) : 제198대 교황(재위: 1342년 5월 7일~1352년 12월 6일)
교황 인노첸시오 6세 (Papa Innocenzo VI, 1352년-1362년) : 제199대 교황(재위: 1352년 12월 18일~1362년 9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5세 (Papa Urbano V, 1362년-1370년) : 제200대 교황(재위: 1362년 9월 28일~1370년 12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Papa Gregorio XI, 1370년-1378년) : 제201대 카톨릭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1378년 3월 27일).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이 크게 약화한 상징적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정통성을 두고 대립하며 교회는 대분열 시대를 맞고 권위를 실추한다.
[1] 아비뇽(Avignon) :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에 속한 도시
[2]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3]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1303년)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4]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프랑스 국왕 [2]필리프 4세와 교황 [3]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으로 1309년 9월 7일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다. 필리프 4세의 심복인 [4]기욤 드 노가레에게 치욕을 당한 후 심한 충격으로 한달만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1305년 새 교황에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즉위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로마는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 필리프 4세의 지원이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아비뇽유수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뇽에서 7명의 교황이 생활하였으며 다음과 같다
교황 클레멘스 5세(Papa Clemente V,1305년-1314년) : 제195대 교황(재위: 1305년 11월 14일~1314년 4월 20일)
교황 요한 22세 (Papa Giovanni XXII, 1316년-1334년) : 제196대 교황(재위: 1316년 8월 7일~1334년 12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 (Papa Benedetto XII, 1334년-1342년) : 제197대 교황(재위: 1334년 12월 30일~1342년 4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6세 (Papa Clemente VI, 1342년-1352년) : 제198대 교황(재위: 1342년 5월 7일~1352년 12월 6일)
교황 인노첸시오 6세 (Papa Innocenzo VI, 1352년-1362년) : 제199대 교황(재위: 1352년 12월 18일~1362년 9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5세 (Papa Urbano V, 1362년-1370년) : 제200대 교황(재위: 1362년 9월 28일~1370년 12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Papa Gregorio XI, 1370년-1378년) : 제201대 카톨릭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1378년 3월 27일).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이 크게 약화한 상징적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정통성을 두고 대립하며 교회는 대분열 시대를 맞고 권위를 실추한다.
[1] 아비뇽(Avignon) :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에 속한 도시
[2]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3]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1303년)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4]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1453년(116년)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이 계속 싸운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등이 있었다.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의 의주·정주·인주·철주의 4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까지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하여 서경 탈환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홍건적을 압록강까지 물리쳤다.
* 공민왕 : 고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 서경(西京)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중 3경(서경,개경,동경 혹은 서경,개경,남경)중 하나이다. 현재의 평양이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하여 서경 탈환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홍건적을 압록강까지 물리쳤다.
* 공민왕 : 고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 서경(西京)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중 3경(서경,개경,동경 혹은 서경,개경,남경)중 하나이다. 현재의 평양이다.
1361년 9월(공민왕 10년) 홍건적이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1개월만에 개경을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 대장 공주와 함께 복주(안동)까지 피난을 떠났다. 이후 고려군은 반격을 준비하여 홍건적을 격파하는 전과가 이어지면서 1362년 1월 개경에서의 치열한 전투에서 홍건적의 절반은 전사하고 절반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 공민왕 : 거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 공민왕 : 거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서방교회가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분열을 겪었던 혼란의 시기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통일성을 크게 흔들었다.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
황산대첩은 1380년([1]우왕 6) 9월 이성계 등이 전라도 남원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1350년대부터 왜구의 침략은 비번했다. 왜구는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400여척의 배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포함한 전국을 노략질하였다. 당시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닌 일본의 토호가 직접 운영하는 정규 군대였다.
1380년([1]우왕 6년) 나세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군은 [7]진포에 주둔하던 왜구의 함선 500여 척을 화포로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퇴로가 막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왜구는 [4]옥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여 충북 영동·황간을 거쳐 경북 상주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여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들은 이어 경상남도가지 이동하여 함양군인 [8]사근내역을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고려 조정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과 맞섰으나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왜구는 남원에 주둔하면서 개경으로 북상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2]이성계를 [5]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다.
[2]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6]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황산 북서쪽의 정산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왜구들이 먼저 산 위에 위치하여 공격을 하여 전투 초반 승기를 잡았으나,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고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 벌인 고려군에 패배하게 된다.
이때 전사한 왜구가 흘린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 인근 주민들이 일주일 가까이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군은 왜구로부터 말 1,600필을 포함하여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병기를 거두어들였다. 바위는 왜구의 피로 붉게 불들어 혈암(血巖)이라 했다.
이성계는 불리한 지형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왜구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세력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이성계는 고려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군대가 개선하자 영접하러 나온 [3]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성계를 치하했다고 한다. [1] 우왕은 이성계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여러 장수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하여 전공을 치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일제강점기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새로 복원되었다.
[1] 우왕(禑王, 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10월 30일~1388년 7월 11일)
[2] 이성계(李成桂), 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13일~1398년 10월 22일)
[3]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 :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 고려의 충신
[4] 옥주(沃州) :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5] 양광도(楊廣道) : 고려의 행정구역인 5도의 하나로, 양주(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와 광주(현재의 서울 강남 지역과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의 앞글자를 따서 양광도라 하였다. 현재의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6] 아지발도(阿只拔都, ? ~ 1380년) : 고려 우왕(禑王) 6년(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지휘했던 일본의 무장으로 매우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무용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백마를 타고 목과 얼굴을 감싼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 창을 휘두르며 고려군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방언이며,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아지발도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용감한 소년을 의미한다
[7] 진포(鎭浦) : 금강 하류, 충청남도 서천군 남쪽에 있었던 해포(海浦)
[8] 사근내역(沙近乃驛) :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
1350년대부터 왜구의 침략은 비번했다. 왜구는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400여척의 배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포함한 전국을 노략질하였다. 당시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닌 일본의 토호가 직접 운영하는 정규 군대였다.
1380년([1]우왕 6년) 나세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군은 [7]진포에 주둔하던 왜구의 함선 500여 척을 화포로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퇴로가 막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왜구는 [4]옥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여 충북 영동·황간을 거쳐 경북 상주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여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들은 이어 경상남도가지 이동하여 함양군인 [8]사근내역을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고려 조정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과 맞섰으나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왜구는 남원에 주둔하면서 개경으로 북상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2]이성계를 [5]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다.
[2]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6]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황산 북서쪽의 정산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왜구들이 먼저 산 위에 위치하여 공격을 하여 전투 초반 승기를 잡았으나,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고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 벌인 고려군에 패배하게 된다.
이때 전사한 왜구가 흘린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 인근 주민들이 일주일 가까이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군은 왜구로부터 말 1,600필을 포함하여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병기를 거두어들였다. 바위는 왜구의 피로 붉게 불들어 혈암(血巖)이라 했다.
이성계는 불리한 지형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왜구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세력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이성계는 고려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군대가 개선하자 영접하러 나온 [3]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성계를 치하했다고 한다. [1] 우왕은 이성계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여러 장수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하여 전공을 치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일제강점기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새로 복원되었다.
[1] 우왕(禑王, 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10월 30일~1388년 7월 11일)
[2] 이성계(李成桂), 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13일~1398년 10월 22일)
[3]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 :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 고려의 충신
[4] 옥주(沃州) :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5] 양광도(楊廣道) : 고려의 행정구역인 5도의 하나로, 양주(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와 광주(현재의 서울 강남 지역과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의 앞글자를 따서 양광도라 하였다. 현재의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6] 아지발도(阿只拔都, ? ~ 1380년) : 고려 우왕(禑王) 6년(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지휘했던 일본의 무장으로 매우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무용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백마를 타고 목과 얼굴을 감싼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 창을 휘두르며 고려군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방언이며,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아지발도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용감한 소년을 의미한다
[7] 진포(鎭浦) : 금강 하류, 충청남도 서천군 남쪽에 있었던 해포(海浦)
[8] 사근내역(沙近乃驛) :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
1383년과 1384년 동안 [3]구 스위스 연방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해당 지역에서 추구하던 이익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중세 말기 상업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자치권과 경제적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4]루체른을 비롯한 도시들은 [3]구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며 세력을 확장하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존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게 되었다.
1386년, 합스부르크 공작 [2]레오폴드 3세는 루체른과 인근 연방 도시들을 진압하기 위해 약 4,0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스위스 중부로 진격하였다. 이에 맞선 스위스 연방군은 약 1,500~2,000명 규모로 대부분이 평민 출신 민병대로 열세였으나 그 결속력과 지형 활용 능력은 뛰어났다.
[1]젬파흐는 루체른 호수 북서쪽에 자리한 평야 지대로, 구 스위스 연방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군이 이 지역에서 충돌하였다. 지형은 주변에 숲과 언덕이 있어 기동력이 낮은 중무장 기사단에 불리하고 스위스 민병대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전투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벌어졌으며 중무장을 한 합스부르크 기사단은 더위와 지형으로 인해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반면 스위스군은 긴 창을 이용한 밀집 방어 대형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며, 험준한 지형을 유리하게 활용해 적진을 강하게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이 전투에는 [5]아놀드 폰 빙켈리트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스스로 적군의 창을 껴안으며 돌파구를 열어 스위스군이 그 틈을 통해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정확한 사료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스위스의 민족 영웅담으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스위스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군의 진영을 돌파하여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2]레오폴드 3세와 함께 수 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승리한 구 스위스 연방은 루체른이 지역 수도로 자리 잡으면서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37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분할되면서 라인 강 유역에 대한 레오폴트 가문의 지배력은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이후 몇 년 동안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바치던 지역 유력자들의 전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 지역의 지배 구조는 점차 붕괴되었다. 그 결과 [4]루체른, [8]베른, [9]졸로투른을 비롯한 연합 도시들은 방어가 허술해진 합스부르크 영토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389년까지 루체른은 젬파흐 호수, [6]빌리사우, [7]엔틀레부흐 주변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으며, 이는 오늘날 루체른 주의 영토와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젬파흐 전투는 스위스의 국방 정신과 시민들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후 스위스 국민들 사이에서 자유와 희생, 독립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1] 젬파흐(Sempach): 스위스 루체른주의 주르제구에 있는 마을
[2] 레오폴드 3세(Leopold III, 1351년 11월 1일 ~ 1386년 7월 9일) : 오스트리아의 공작(재위 : 1365–1386년 7월 9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레오폴드 가문의 시조. 정의의 왕(der Gerechte)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젬파흐 전투에서 사망
[3] 구 스위스 연방(Old Swiss Confederacy) : 신성 로마 제국내에 스위스 중부 지역의 도시와 농촌 공동체들이 자치권과 상업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연합. 오늘날 스위스의 전신
[4] 루체른(Luzern) : 스위스 중부 루체른주에 있는 도시로 루체른 주의 주도
[5] 아놀드 폰 빙켈리트(Arnold von Winkelried) : 스위스 역사의 전설적인 영웅. 16세기 스위스 사학에 따르면 빙켈리트의 희생 덕분에 구 스위스 연방은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작 레오폴트 3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6] 빌리사우(Willisau) : 스위스 루체른주 빌리사우구에 있는 자치구
[7] 엔틀레부흐(Entlebuch) : 스위스 루체른주에 있는 지자체
[8] 베른(Bern) : 스위스 수도이며 베른 주 주도
[9] 졸로투른(Entlebuch) : 스위스 졸로투른 주의 주도
당시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중세 말기 상업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자치권과 경제적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4]루체른을 비롯한 도시들은 [3]구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며 세력을 확장하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존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게 되었다.
1386년, 합스부르크 공작 [2]레오폴드 3세는 루체른과 인근 연방 도시들을 진압하기 위해 약 4,0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스위스 중부로 진격하였다. 이에 맞선 스위스 연방군은 약 1,500~2,000명 규모로 대부분이 평민 출신 민병대로 열세였으나 그 결속력과 지형 활용 능력은 뛰어났다.
[1]젬파흐는 루체른 호수 북서쪽에 자리한 평야 지대로, 구 스위스 연방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군이 이 지역에서 충돌하였다. 지형은 주변에 숲과 언덕이 있어 기동력이 낮은 중무장 기사단에 불리하고 스위스 민병대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전투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벌어졌으며 중무장을 한 합스부르크 기사단은 더위와 지형으로 인해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반면 스위스군은 긴 창을 이용한 밀집 방어 대형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며, 험준한 지형을 유리하게 활용해 적진을 강하게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이 전투에는 [5]아놀드 폰 빙켈리트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스스로 적군의 창을 껴안으며 돌파구를 열어 스위스군이 그 틈을 통해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정확한 사료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스위스의 민족 영웅담으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스위스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군의 진영을 돌파하여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2]레오폴드 3세와 함께 수 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승리한 구 스위스 연방은 루체른이 지역 수도로 자리 잡으면서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37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분할되면서 라인 강 유역에 대한 레오폴트 가문의 지배력은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이후 몇 년 동안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바치던 지역 유력자들의 전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 지역의 지배 구조는 점차 붕괴되었다. 그 결과 [4]루체른, [8]베른, [9]졸로투른을 비롯한 연합 도시들은 방어가 허술해진 합스부르크 영토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389년까지 루체른은 젬파흐 호수, [6]빌리사우, [7]엔틀레부흐 주변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으며, 이는 오늘날 루체른 주의 영토와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젬파흐 전투는 스위스의 국방 정신과 시민들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후 스위스 국민들 사이에서 자유와 희생, 독립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1] 젬파흐(Sempach): 스위스 루체른주의 주르제구에 있는 마을
[2] 레오폴드 3세(Leopold III, 1351년 11월 1일 ~ 1386년 7월 9일) : 오스트리아의 공작(재위 : 1365–1386년 7월 9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레오폴드 가문의 시조. 정의의 왕(der Gerechte)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젬파흐 전투에서 사망
[3] 구 스위스 연방(Old Swiss Confederacy) : 신성 로마 제국내에 스위스 중부 지역의 도시와 농촌 공동체들이 자치권과 상업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연합. 오늘날 스위스의 전신
[4] 루체른(Luzern) : 스위스 중부 루체른주에 있는 도시로 루체른 주의 주도
[5] 아놀드 폰 빙켈리트(Arnold von Winkelried) : 스위스 역사의 전설적인 영웅. 16세기 스위스 사학에 따르면 빙켈리트의 희생 덕분에 구 스위스 연방은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작 레오폴트 3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6] 빌리사우(Willisau) : 스위스 루체른주 빌리사우구에 있는 자치구
[7] 엔틀레부흐(Entlebuch) : 스위스 루체른주에 있는 지자체
[8] 베른(Bern) : 스위스 수도이며 베른 주 주도
[9] 졸로투른(Entlebuch) : 스위스 졸로투른 주의 주도
14세기 말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밖으로는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명나라의 [1]홍무제는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1387년(우왕 13) 12월에 [2]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고려는 국왕 [3]우왕과 [4]문하시중 [5]최영등 강경세력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7]이성계는 첫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며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침략할 것이며 넷재,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 [5]최영, 좌군도통사 [8]조민수, 우군통도사 [7]이성계로 편제하여 우왕과 최영은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7]이성계와 [8]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음력 4월 18일 서경(평양)을 출발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으나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음력 5월 7일 [6]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7]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결정하였다.
5월 22일 출발하여 6월 1일 개경 근처에 도착하여 6월 3일 최영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위화도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최영과 우왕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궁궐을 장악한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고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개경(개성)으로 압송돼 처형되었고,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역시 1년뒤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나무위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홍무제(1328년~1398년) : 명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 1368년 ~ 1398년). 본명인 주원장(朱元璋)으로 유명하다
[2] 철령위(鐵嶺衛) : 고려 말인 1387년(우왕 13년), 중국 명(明)이 철령 이북의 고려 동북방 변경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려 했던 군사적 행정기구
[3] 우왕(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1388년). 최영의 사위
[4]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품계는 종1품이다. 조선의 영의정과 같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벼슬이다.
[5]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6] 위화도 : 평안북도 신의주에 속해있는 압록강 한 가운데 있는 섬
[7] 이성계(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1398년).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8] 조민수(미상 ~ 1391년) : 고려 말의 무신, 군인, 정치가
명나라의 [1]홍무제는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1387년(우왕 13) 12월에 [2]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고려는 국왕 [3]우왕과 [4]문하시중 [5]최영등 강경세력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7]이성계는 첫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며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침략할 것이며 넷재,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 [5]최영, 좌군도통사 [8]조민수, 우군통도사 [7]이성계로 편제하여 우왕과 최영은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7]이성계와 [8]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음력 4월 18일 서경(평양)을 출발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으나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음력 5월 7일 [6]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7]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결정하였다.
5월 22일 출발하여 6월 1일 개경 근처에 도착하여 6월 3일 최영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위화도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최영과 우왕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궁궐을 장악한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고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개경(개성)으로 압송돼 처형되었고,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역시 1년뒤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나무위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홍무제(1328년~1398년) : 명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 1368년 ~ 1398년). 본명인 주원장(朱元璋)으로 유명하다
[2] 철령위(鐵嶺衛) : 고려 말인 1387년(우왕 13년), 중국 명(明)이 철령 이북의 고려 동북방 변경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려 했던 군사적 행정기구
[3] 우왕(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1388년). 최영의 사위
[4]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품계는 종1품이다. 조선의 영의정과 같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벼슬이다.
[5]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6] 위화도 : 평안북도 신의주에 속해있는 압록강 한 가운데 있는 섬
[7] 이성계(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1398년).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8] 조민수(미상 ~ 1391년) : 고려 말의 무신, 군인, 정치가
14세기 말 고려(高麗, 917-1392)는 내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고 외적으로는 원(元,1271~1368)에서 명(明, 1368~1644)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1388년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제32대 우왕과 최영장군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정도전, 조준등)들은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 우왕(1365년~1389년) : 고려 제32대 국왕. 재위 1374년~1388년
* 공양왕(1345년~1394년) :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 재위 1389년~1392년
*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 위화도회군 :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등이 위화도(압록강의 하중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하도는 광복 당시 행정 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이며 현재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에 속한다
* 하중도 : 강 한 가운데 있는 섬
1388년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제32대 우왕과 최영장군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정도전, 조준등)들은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 우왕(1365년~1389년) : 고려 제32대 국왕. 재위 1374년~1388년
* 공양왕(1345년~1394년) :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 재위 1389년~1392년
*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 위화도회군 :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등이 위화도(압록강의 하중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하도는 광복 당시 행정 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이며 현재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에 속한다
* 하중도 : 강 한 가운데 있는 섬
고려의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 등을 제거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조선 3대 임금 태종, 재위:1400년~1418년)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고, 막내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현하려 한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세자 방석을 보좌하며 이방원을 견제하고,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개국 공신과 종친 세력을 압박하였다.
정도전의 요동 정벌과 사병 혁파로 위기를 느낀 이방원은 정도전일파와 세자인 이방석을 무력으로 제거하였다. 이 난의 결과로 태조 이성계(재위:1392년~1398)가 둘째 이방과에게 양위하여 정종(조선 2대 국왕, 재위: 1398년~1400년)이 즉위하였고 이방원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인년(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정몽주(1337~1392) : 고려의 충신(忠臣)으로 정치가·교육자·유학자이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 정도전(1342~1398)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도전의 요동 정벌과 사병 혁파로 위기를 느낀 이방원은 정도전일파와 세자인 이방석을 무력으로 제거하였다. 이 난의 결과로 태조 이성계(재위:1392년~1398)가 둘째 이방과에게 양위하여 정종(조선 2대 국왕, 재위: 1398년~1400년)이 즉위하였고 이방원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인년(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정몽주(1337~1392) : 고려의 충신(忠臣)으로 정치가·교육자·유학자이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 정도전(1342~1398)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난의 변은 중국 명나라 초기에 일어난 내전으로 명 태조인 [1]주원장(홍무제)이 사망하자 그 손자인 [2]주윤문(건문제)와 그의 숙부 [3]주체(영락제) 사이의 권력 투쟁이었다. 이 사건은 명나라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며 향후 통치 방향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명나라의 태조 [1]주원장(홍무제)은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기 위하여 수 많은 공신을 숙청하고, 자신의 아들 25여명을 병력과 함께 전국 각지의 왕(번왕)으로 봉해 [6]번병으로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황실을 방어하였다. [1]주원장의 4남인 [3]주체는 1370년에 연왕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다.
1392년에 주원장(홍무제)의 장남인 황태자 [4]주표가 갑자기 사망하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주표의 아들이자 주원장의 손자인 [2]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었다.
1398년에 주원장이 사망하자 생전의 지위를 이어받은 [2]주윤문이 명나라 제2대 황제인 건문제로 즉위하였다. 조부인 주원장의 숙청으로 개국공신들이 사라지자 26명이나 되는 자신의 숙부들이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부상하였다.
[2]주윤문(건문제)은 즉위 직후 조부가 세워둔 번왕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5]삭번정책을 단행하였다. 번왕들을 폐위하거나 감금하면서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지방에 독자적인 군권과 재정을 가진 번왕들의 세력이 중앙 통제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지방 안정을 위해 형성된 종친 왕국 체제를 흔들었고 특히 [3]연왕 주체는 생존을 위협을 느끼고 황제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1399년 7월 5일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체의 반란군은 정난군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전쟁 초기는 건문제의 조정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1402년, 정난군은 최종 진격을 감행하여 7월 13일 마침내 수도인 [7]남경을 점령하였다. 정난군이 황궁으로 밀려들자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그의 생사는 영원히 미궁으로 남았다. 궁중에서 불 타 죽었다는 말도 있고 도망쳐 중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승리한 주체는 황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영락으로 고쳤다. 그리고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8]대운하의 정비, [9]정화의 원정 추진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통해 제국의 위신을 강화하면서 명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북경의 자금성도 천도 이후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난의 변에서 자신에게 반대한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각지에서 처형된 자들이 1만 명에 달했다. 이를 "임오순난"이라 한다.
[1] 홍무제 주원장(洪武帝 朱元璋, 1328년 10월 29일 ~ 1398년 6월 24일) : 중국 명나라의 초대황제(재위, 1368년 1월 23일 ~ 1398년 6월 24일). 묘호는 태조(太祖)
[2] 건문제 주윤문(建文帝 朱允炆, 1377년 12월 13일 ~ 1402년) : 명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398년 7월 8일 ~ 1402년 7월 13일). 홍무제의 손자. 묘호는 혜종(惠宗)
[3] 영락제 주체(永樂帝 朱棣,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 : 명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 7월 13일 ~ 1424년 8월 12일). 홍무제의 4남. 연왕(燕王, 재위 : 1370년 5월 2일 ~ 1402년 7월 13일). 묘호는 태종(太宗)-> 성조(成祖)
[4] 주표(朱標, 1355년 10월 10일 ~ 1392년 5월 17일) : 홍무제의 장남. 명나라의 황태자이자 추존황제. 묘호는 흥종(興宗)
[5] 삭번정책(削藩政策) : 명나라 초기에 건문제가 강력해진 제후왕(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 건문제는 삭번 정책을 통해 다섯 명의 제후왕을 제거했다
[6] 번병(藩屛) : 중국의 황실의 안전과 왕조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종친들에게 지방을 분봉하여 군사적·행정적 방어 책임을 맡긴 제도. 이 제도는 "성을 두르고 병풍처럼 지킨다"는 뜻을 가지며, 번(藩)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방어 구역, 병(屛)은 황제를 보호하는 병풍을 의미한다
[7]남경(南京) : 난징. "남쪽의 수도"를 의미하며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초기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였다
[8] 대운하 : 중국 수나라부터 시작되어 원나라 시기에 개수된 대운하를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완성한 사업으로 약 1,800km에 달하는 내륙 수상 운송망
[9] 정화의 원정 :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떠난 해외 탐험 및 항해이다. 이 원정은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유럽의 탐험보다 훨씬 앞선 규모의 항해로 명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조공 관계를 맺는 등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가졌다
명나라의 태조 [1]주원장(홍무제)은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기 위하여 수 많은 공신을 숙청하고, 자신의 아들 25여명을 병력과 함께 전국 각지의 왕(번왕)으로 봉해 [6]번병으로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황실을 방어하였다. [1]주원장의 4남인 [3]주체는 1370년에 연왕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다.
1392년에 주원장(홍무제)의 장남인 황태자 [4]주표가 갑자기 사망하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주표의 아들이자 주원장의 손자인 [2]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었다.
1398년에 주원장이 사망하자 생전의 지위를 이어받은 [2]주윤문이 명나라 제2대 황제인 건문제로 즉위하였다. 조부인 주원장의 숙청으로 개국공신들이 사라지자 26명이나 되는 자신의 숙부들이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부상하였다.
[2]주윤문(건문제)은 즉위 직후 조부가 세워둔 번왕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5]삭번정책을 단행하였다. 번왕들을 폐위하거나 감금하면서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지방에 독자적인 군권과 재정을 가진 번왕들의 세력이 중앙 통제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지방 안정을 위해 형성된 종친 왕국 체제를 흔들었고 특히 [3]연왕 주체는 생존을 위협을 느끼고 황제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1399년 7월 5일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체의 반란군은 정난군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전쟁 초기는 건문제의 조정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1402년, 정난군은 최종 진격을 감행하여 7월 13일 마침내 수도인 [7]남경을 점령하였다. 정난군이 황궁으로 밀려들자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그의 생사는 영원히 미궁으로 남았다. 궁중에서 불 타 죽었다는 말도 있고 도망쳐 중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승리한 주체는 황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영락으로 고쳤다. 그리고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8]대운하의 정비, [9]정화의 원정 추진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통해 제국의 위신을 강화하면서 명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북경의 자금성도 천도 이후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난의 변에서 자신에게 반대한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각지에서 처형된 자들이 1만 명에 달했다. 이를 "임오순난"이라 한다.
[1] 홍무제 주원장(洪武帝 朱元璋, 1328년 10월 29일 ~ 1398년 6월 24일) : 중국 명나라의 초대황제(재위, 1368년 1월 23일 ~ 1398년 6월 24일). 묘호는 태조(太祖)
[2] 건문제 주윤문(建文帝 朱允炆, 1377년 12월 13일 ~ 1402년) : 명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398년 7월 8일 ~ 1402년 7월 13일). 홍무제의 손자. 묘호는 혜종(惠宗)
[3] 영락제 주체(永樂帝 朱棣,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 : 명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 7월 13일 ~ 1424년 8월 12일). 홍무제의 4남. 연왕(燕王, 재위 : 1370년 5월 2일 ~ 1402년 7월 13일). 묘호는 태종(太宗)-> 성조(成祖)
[4] 주표(朱標, 1355년 10월 10일 ~ 1392년 5월 17일) : 홍무제의 장남. 명나라의 황태자이자 추존황제. 묘호는 흥종(興宗)
[5] 삭번정책(削藩政策) : 명나라 초기에 건문제가 강력해진 제후왕(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 건문제는 삭번 정책을 통해 다섯 명의 제후왕을 제거했다
[6] 번병(藩屛) : 중국의 황실의 안전과 왕조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종친들에게 지방을 분봉하여 군사적·행정적 방어 책임을 맡긴 제도. 이 제도는 "성을 두르고 병풍처럼 지킨다"는 뜻을 가지며, 번(藩)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방어 구역, 병(屛)은 황제를 보호하는 병풍을 의미한다
[7]남경(南京) : 난징. "남쪽의 수도"를 의미하며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초기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였다
[8] 대운하 : 중국 수나라부터 시작되어 원나라 시기에 개수된 대운하를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완성한 사업으로 약 1,800km에 달하는 내륙 수상 운송망
[9] 정화의 원정 :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떠난 해외 탐험 및 항해이다. 이 원정은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유럽의 탐험보다 훨씬 앞선 규모의 항해로 명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조공 관계를 맺는 등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가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이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음으로 방간의 난, 박포의 난 등으로도 불린다.
1차 왕자의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던 박포는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다. 이에 왕위 계승에 야심이 있었던 이방간이 인격, 위세등이 이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이 많자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이방간은 토산현(황해도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난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박포 :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지중추부사(조선의 정2품 관직)가 되었다. 2등 관직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1차 왕자의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던 박포는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다. 이에 왕위 계승에 야심이 있었던 이방간이 인격, 위세등이 이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이 많자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이방간은 토산현(황해도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난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박포 :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지중추부사(조선의 정2품 관직)가 되었다. 2등 관직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아쟁쿠르 전투는 영국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싸운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의 전투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는 불리한 전력으로 프랑스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415년 10월 25일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에서 벌어졌다.
잉글랜드의 [1]헨리 5세는 1415년 8월 13일 약 12,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 프랑스에 상륙하여 항구도시인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을 승리하였다. 잉글랜드는 공전전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으로 병력 감소 및 사기저하, 전염병등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이동하여 잉글랜드로 퇴각하려고 했다.
칼레로 향하는 좁은 아쟁쿠르 지역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과 마주하였다. 프랑스군은 선봉대 보병부대와 그 뒤로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사단들이 버티고 있어 사기가 충만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어 선봉대인 보병부대가 진격하였지만 잉글랜드군의 장궁의 세례를 받아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의 기사단이 돌격하였으나 불운하게도 들판에 널브러진 자국의 보병으로 방해를 받았고, 비로 인한 전장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무거운 기사단의 무거운 갑옷이 방해가 되어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잉글랜드의 장궁의 표적이 되었다.
계속되는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귀족인 기사들도 많이 죽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군의 피해는 미비했다. 결국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3]부르고뉴파는 프랑스 왕 [2]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와 [1]헨리5세의 결혼과 이들의 2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 1420)을 맺었다. [1]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영국 사료에 따르면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10배이상으로 우세하여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료는 5배 혹은 비등한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사료 및 자료를 바탕으로 병력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잉글랜드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5세의 유명한 [4]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과 관련이 있다. 10월 25일은 카톨릭 성인중 한명인 성 크리스핀의 축일이다.
[1]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2]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3] 부르고뉴파(Burgundian) : 프랑스 귀족의 한 당파. 부르고뉴 공을 중심으로 하여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으며 아르마냐크파와 대립하였다.
[4] 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St Crispin's Day Speech) : 섹스피어의 작품 '헨리5세'에서 헨리5세가 남긴 연설이다. 이중 일부 구절인 "우리는 적고, 우리의 행복은 작으나, 우리는 형제입니다."이 유명한 구절이다. 실제 헨리5세가 연설한 것은 아니고 작품에서 존재한다.
잉글랜드의 [1]헨리 5세는 1415년 8월 13일 약 12,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 프랑스에 상륙하여 항구도시인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을 승리하였다. 잉글랜드는 공전전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으로 병력 감소 및 사기저하, 전염병등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이동하여 잉글랜드로 퇴각하려고 했다.
칼레로 향하는 좁은 아쟁쿠르 지역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과 마주하였다. 프랑스군은 선봉대 보병부대와 그 뒤로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사단들이 버티고 있어 사기가 충만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어 선봉대인 보병부대가 진격하였지만 잉글랜드군의 장궁의 세례를 받아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의 기사단이 돌격하였으나 불운하게도 들판에 널브러진 자국의 보병으로 방해를 받았고, 비로 인한 전장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무거운 기사단의 무거운 갑옷이 방해가 되어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잉글랜드의 장궁의 표적이 되었다.
계속되는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귀족인 기사들도 많이 죽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군의 피해는 미비했다. 결국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3]부르고뉴파는 프랑스 왕 [2]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와 [1]헨리5세의 결혼과 이들의 2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 1420)을 맺었다. [1]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영국 사료에 따르면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10배이상으로 우세하여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료는 5배 혹은 비등한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사료 및 자료를 바탕으로 병력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잉글랜드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5세의 유명한 [4]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과 관련이 있다. 10월 25일은 카톨릭 성인중 한명인 성 크리스핀의 축일이다.
[1]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2]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3] 부르고뉴파(Burgundian) : 프랑스 귀족의 한 당파. 부르고뉴 공을 중심으로 하여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으며 아르마냐크파와 대립하였다.
[4] 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St Crispin's Day Speech) : 섹스피어의 작품 '헨리5세'에서 헨리5세가 남긴 연설이다. 이중 일부 구절인 "우리는 적고, 우리의 행복은 작으나, 우리는 형제입니다."이 유명한 구절이다. 실제 헨리5세가 연설한 것은 아니고 작품에서 존재한다.
카톨릭 사제이자 프라하 신학대학 교수였던 [1]얀 후스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이 명시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교황청은 분열된 교회의 통합을 위해 개최된 [7, 8, 9]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1]얀 후스에게 요구하였다. 얀 후스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가지 않으려 했으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인 [3]지기스문트가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자 자신의 주장을 전하고자 참석했다. [7]콘스탄츠에 도착한 얀 후스는 1414년 11월 28일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7월 6일 이단으로 규정하여 얀 후스를 화형으로 처형하였다.
이는 [2]보헤미아 전역에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얀 후스를 따르던 후스주의자들은 [9]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면서 카톨릭과 갈등이 깊어졌다.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에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 시위를 하면서 시의회 의원 7명을 시청사 창문 밖으로 던져 죽인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2]보헤미아 국왕 [10]바츨라프 4세가 사망하자 이복동생인 [3]지기스문트가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1]얀 후스를 죽게 만든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후스파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스전쟁이 발발했다.
1419년 12월 네크미르에서 후스파와 보헤미아 군대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후스파 군대는 소규모 군대였지만 [5]얀 지슈카의 지휘 아래 승리했다. 후스파는 여세를 몰아 보헤미아 주변 지역을 장악하여 영역을 넓혀갔으며 교리를 전파했다.
[3]지기스문트와 교황 [4]마르티노 5세는 후스파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십자군을 선포하여 보헤미아에 진격하여 격돌했다. 그러나 후스파는 [5]얀 지슈카의 뛰어난 지휘 아래, 전차를 이용한 방어 전술과 화약 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십자군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카톨릭 연합군인 십자군이 5차례 침공하였으나 전부 패배하면서 진압에 실패한 카톨릭 교회측은 후스파의 사상이 전파되리라 우려하여 1433년에 열린 바젤 공의회에서 평화협상을 논의하였다.
평화협정을 두고 후스파 내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1424년에 이미 얀 지슈카라는 명장을 잃은 강경파는 1434년 5월 30일 [6]리파니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와 연합한 온건파에게 대패하면서 후스전쟁은 종결되었다.
온건파는 1436년 카톨릭 교회측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양형파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왕에게 순종하는 대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찬례에서 후스파의 관습을 용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합의했다. 이들 후스파들은 현재도 체코에서 소수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 얀 후스(Jan Hus, 1372년 ? ~ 1415년 7월 6일) :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
[2] 보헤미아 왕국(Kingdom of Bohemia, 1198년 ~ 1918년) : 오늘날 체코의 전신.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 편입.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해 10월 31일 해체되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3]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년 2월 14일 ~ 1437년 12월 9일)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마지막 룩셈부르크 왕조의 제3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1433년 5월 31일 ~ 1437년 12월 9일). 이후 합스부르크 가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보헤미아 국왕(재위, 1419년 8월 16일 ~ 1437년 12월 9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419년 8월 16일 ~ 1437년 12월 9일)
[4] 마르티노 5세 (Martinus V, 1369년 ? ~ 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1417년 11월 11일 ~ 1431년 2월 20일)
[5] 얀 지슈카(체코어: Jan Žižka, 1360년 ? ~ 1424년 10월 11일) : 보헤미아의 장군.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화형당한 뒤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를 이끈 지도자. 모라비아(Moravia, 오늘날 체코의 동부지역)를 공략하던 중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체코의 국민영웅
[6] 리파니 전투(Lipany) : 1434년 5월 30일 프라하 인근 리파니 평원에서 후스파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맞붙은 전투. 후스 전쟁 최후의 전투
[7] 콘스탄츠(Konstanz) : 독일 남쪽 보덴호에 위치한 도시
[8] 공의회(Concilium) : 기독교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9] 콘스탄츠 공의회(Concilium Constantiense, 1414년 ~ 1418년)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3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했던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마르티노 5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교회의 일치를 회복했으며, 이단 문제를 다루었다
[10] 바츨라프 4세(Václav IV, 1361년 2월 26일 ~ 1419년 8월 16일) : 보헤미아 왕국 국왕(재위, 1378년 11월 29일 ~ 1419년 8월 16일)
교황청은 분열된 교회의 통합을 위해 개최된 [7, 8, 9]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1]얀 후스에게 요구하였다. 얀 후스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가지 않으려 했으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인 [3]지기스문트가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자 자신의 주장을 전하고자 참석했다. [7]콘스탄츠에 도착한 얀 후스는 1414년 11월 28일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7월 6일 이단으로 규정하여 얀 후스를 화형으로 처형하였다.
이는 [2]보헤미아 전역에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얀 후스를 따르던 후스주의자들은 [9]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면서 카톨릭과 갈등이 깊어졌다.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에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 시위를 하면서 시의회 의원 7명을 시청사 창문 밖으로 던져 죽인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2]보헤미아 국왕 [10]바츨라프 4세가 사망하자 이복동생인 [3]지기스문트가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1]얀 후스를 죽게 만든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후스파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스전쟁이 발발했다.
1419년 12월 네크미르에서 후스파와 보헤미아 군대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후스파 군대는 소규모 군대였지만 [5]얀 지슈카의 지휘 아래 승리했다. 후스파는 여세를 몰아 보헤미아 주변 지역을 장악하여 영역을 넓혀갔으며 교리를 전파했다.
[3]지기스문트와 교황 [4]마르티노 5세는 후스파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십자군을 선포하여 보헤미아에 진격하여 격돌했다. 그러나 후스파는 [5]얀 지슈카의 뛰어난 지휘 아래, 전차를 이용한 방어 전술과 화약 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십자군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카톨릭 연합군인 십자군이 5차례 침공하였으나 전부 패배하면서 진압에 실패한 카톨릭 교회측은 후스파의 사상이 전파되리라 우려하여 1433년에 열린 바젤 공의회에서 평화협상을 논의하였다.
평화협정을 두고 후스파 내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1424년에 이미 얀 지슈카라는 명장을 잃은 강경파는 1434년 5월 30일 [6]리파니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와 연합한 온건파에게 대패하면서 후스전쟁은 종결되었다.
온건파는 1436년 카톨릭 교회측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양형파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왕에게 순종하는 대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찬례에서 후스파의 관습을 용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합의했다. 이들 후스파들은 현재도 체코에서 소수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 얀 후스(Jan Hus, 1372년 ? ~ 1415년 7월 6일) :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
[2] 보헤미아 왕국(Kingdom of Bohemia, 1198년 ~ 1918년) : 오늘날 체코의 전신.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 편입.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해 10월 31일 해체되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3]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년 2월 14일 ~ 1437년 12월 9일)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마지막 룩셈부르크 왕조의 제3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1433년 5월 31일 ~ 1437년 12월 9일). 이후 합스부르크 가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보헤미아 국왕(재위, 1419년 8월 16일 ~ 1437년 12월 9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419년 8월 16일 ~ 1437년 12월 9일)
[4] 마르티노 5세 (Martinus V, 1369년 ? ~ 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1417년 11월 11일 ~ 1431년 2월 20일)
[5] 얀 지슈카(체코어: Jan Žižka, 1360년 ? ~ 1424년 10월 11일) : 보헤미아의 장군.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화형당한 뒤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를 이끈 지도자. 모라비아(Moravia, 오늘날 체코의 동부지역)를 공략하던 중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체코의 국민영웅
[6] 리파니 전투(Lipany) : 1434년 5월 30일 프라하 인근 리파니 평원에서 후스파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맞붙은 전투. 후스 전쟁 최후의 전투
[7] 콘스탄츠(Konstanz) : 독일 남쪽 보덴호에 위치한 도시
[8] 공의회(Concilium) : 기독교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9] 콘스탄츠 공의회(Concilium Constantiense, 1414년 ~ 1418년)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3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했던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마르티노 5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교회의 일치를 회복했으며, 이단 문제를 다루었다
[10] 바츨라프 4세(Václav IV, 1361년 2월 26일 ~ 1419년 8월 16일) : 보헤미아 왕국 국왕(재위, 1378년 11월 29일 ~ 1419년 8월 16일)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4월 2일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도시 서쪽 외곽에 자리잡았으며 4월 5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곡)의 수도인 노스탄티노플 성문앞에 도착했다.
동로마제국의 군사는 대략 7천명으로 그 중 2천명은 용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요새로 불렸던 만큼 단단한 삼중구조의 성벽과 바다로 둘러쌓여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서쪽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는 20m넓이와 5~10m 깊이로 되어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 넓이 2m와 높이 5m인 외성벽, 넓이 5m와 높이 12m인 내성벽의 구조로 성벽간의 총 거리가 60m에 달해 있었다.
남쪽성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수심 80m의 바마르마라 해협이 감싸고 있어 배한척 댈 수가 없었다. 북서쪽 성벽의 골든혼 입구는 두께 20cm의 굵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적군의 배가 진입할 수 없었다.
마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하여 8m가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포를 배치시켰다. 대포는 헝가리인인 우르반이 제작하였으며 대포를 옮기는데 60마리의 황소와 200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6km의 사정거리와 포탄의 무게만도 0.5톤에 달했다.
오스만군은 대포로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효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포는 열에 약해서 한번 발사하면 열이 식을 때까지 최소 3시간을 기다려 다시 발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열이 식기전에 발사하여 자체 폭발하여 오스만군의 피해도 있었다. 그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군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였다.
대포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심리적 공포는 대단했으며 초반에는 오스만군이 우위를 이어갔다.
대포공격에 이어 성안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에 고용되었던 용병인 바슈보주크군을 선봉으로 공략하였다. 뒤 이어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군까지 진격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진두지휘와 강한 결속력에 막혀 성벽을 뚫는데 실패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도 성벽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정에 나선 오스만제국의 병사들도 지쳐갔다. 메흐메트2세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해 최후의 묘수를 생각해 낸다.
서북쪽 성벽의 골든혼으로 배를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굵은 쇠사슬에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하자 산으로 배를 이동시켰는데 통나무에 기름을 발라 오스만 병사들이 72척의 배를 끌고 골든혼 해안으로 진입하였다. 단 하루만에 72척의 배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7일이 걸렸다고 하는 문헌도 있다.
골든혼에 오스만의 배가 진입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서쪽성벽만을 방어하던 병력이 골든혼으로 분산되어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취약해진 서쪽 성벽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2천년의 명맥을 이어오던 로마제국이 역사속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공략한지 53일만이었으며 마흐메트2세는 비잔틴제국의 상징인 성소피아 사원에서 이슬람의식을 거행했고 파티(Fatih,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노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뒤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자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격전이었으며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역사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으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다.
동로마제국의 군사는 대략 7천명으로 그 중 2천명은 용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요새로 불렸던 만큼 단단한 삼중구조의 성벽과 바다로 둘러쌓여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서쪽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는 20m넓이와 5~10m 깊이로 되어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 넓이 2m와 높이 5m인 외성벽, 넓이 5m와 높이 12m인 내성벽의 구조로 성벽간의 총 거리가 60m에 달해 있었다.
남쪽성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수심 80m의 바마르마라 해협이 감싸고 있어 배한척 댈 수가 없었다. 북서쪽 성벽의 골든혼 입구는 두께 20cm의 굵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적군의 배가 진입할 수 없었다.
마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하여 8m가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포를 배치시켰다. 대포는 헝가리인인 우르반이 제작하였으며 대포를 옮기는데 60마리의 황소와 200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6km의 사정거리와 포탄의 무게만도 0.5톤에 달했다.
오스만군은 대포로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효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포는 열에 약해서 한번 발사하면 열이 식을 때까지 최소 3시간을 기다려 다시 발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열이 식기전에 발사하여 자체 폭발하여 오스만군의 피해도 있었다. 그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군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였다.
대포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심리적 공포는 대단했으며 초반에는 오스만군이 우위를 이어갔다.
대포공격에 이어 성안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에 고용되었던 용병인 바슈보주크군을 선봉으로 공략하였다. 뒤 이어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군까지 진격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진두지휘와 강한 결속력에 막혀 성벽을 뚫는데 실패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도 성벽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정에 나선 오스만제국의 병사들도 지쳐갔다. 메흐메트2세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해 최후의 묘수를 생각해 낸다.
서북쪽 성벽의 골든혼으로 배를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굵은 쇠사슬에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하자 산으로 배를 이동시켰는데 통나무에 기름을 발라 오스만 병사들이 72척의 배를 끌고 골든혼 해안으로 진입하였다. 단 하루만에 72척의 배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7일이 걸렸다고 하는 문헌도 있다.
골든혼에 오스만의 배가 진입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서쪽성벽만을 방어하던 병력이 골든혼으로 분산되어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취약해진 서쪽 성벽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2천년의 명맥을 이어오던 로마제국이 역사속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공략한지 53일만이었으며 마흐메트2세는 비잔틴제국의 상징인 성소피아 사원에서 이슬람의식을 거행했고 파티(Fatih,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노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뒤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자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격전이었으며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역사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으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세종의 차남)이 고명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사건이다.
수양대군은 1455년 조카 단종에게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세조(조선 7대 임금, 재위 1455~1468)이다.
수양대군은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살해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한명회(수양대군의 최측근이자 책사)의 살생부이다. 이 살생부의 첫번째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수양대군은 1455년 조카 단종에게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세조(조선 7대 임금, 재위 1455~1468)이다.
수양대군은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살해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한명회(수양대군의 최측근이자 책사)의 살생부이다. 이 살생부의 첫번째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잉글랜드 왕국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사이의 전쟁이다.
랭커스터 왕가의 문장은 붉은 장미였고, 요크 가문의 문장은 흰색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 플랜태저넷 왕가(House of Plantagenet, 1154년~1485년) : 영국의 왕조 중 하나.
* 랭커스터 왕가(House of Lancaster, 1362년~1472년) : 영국의 왕조 중의 하나.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 요크 왕가(House of York, 1395년~1485년) : 영국의 왕조 중의 하나.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랭커스터 왕가의 문장은 붉은 장미였고, 요크 가문의 문장은 흰색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 플랜태저넷 왕가(House of Plantagenet, 1154년~1485년) : 영국의 왕조 중 하나.
* 랭커스터 왕가(House of Lancaster, 1362년~1472년) : 영국의 왕조 중의 하나.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 요크 왕가(House of York, 1395년~1485년) : 영국의 왕조 중의 하나.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등 신진사류(新進士類, 성종때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기성세력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실록의 사초 문제로 숙청당한 사건.
사대사화(四大士禍) 중 첫번째로 일어났던 사화이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발단되었기에 무오사화라고 한다.
사대사화(四大士禍) 중 첫번째로 일어났던 사화이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발단되었기에 무오사화라고 한다.
연산군의 친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연산군은 이 사실을 왕이 되기전에 알고 있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어머니 사사사건에 직접 연루된 자와 폐비를 지지한 훈구 세력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1504년 음력 3월 20일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2] 귀인 엄(嚴)씨 · [3]귀인 정(鄭)씨를 창경궁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1년 후 사사하였다. 연산군이 할머니인 [1]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서 폭언을 하자,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달후 세상을 떠났다.
갑자사화로 인해 [4] 윤필상 · [5]이극균 · [6]이세좌를 비롯하여 여러 신하들이 극형에 처해졌다. 사화는 점점 확대되어 240여 명이 처벌받았으며 이중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7] 부관참시, [8]부관능지를 당했다고 한다.
이 사화를 계기로 더 심해진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 변동과 정치 문화를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9]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
[1]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년 ~ 1504년) : 추존 왕 덕종의 비.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2] 귀인엄씨(貴人嚴氏, ? ~ 1504년) : 성종(조선 제9대왕)의 후궁
[3] 귀인정씨(貴人鄭氏, ? ~ 1504년) : 성종(조선 제9대왕)의 후궁
[4] 윤필상(尹弼商, 1427년 ~ 1504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성종의 장인.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신진사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하고 정적을 숙청하였다. 자신도 폐비 윤씨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5] 이극균(李克均, 1437년 ~ 1504년) : 조선의 문신. 1503년에는 좌의정. 조카 이세좌와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6] 이세좌(李世佐, 1445년 ∼ 1504년): 조선의 문신.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 참석, 어사주를 회배(回盃)할 때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유배되었다. 1504년 조정에 복귀하는 듯 했지만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직접 전달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자결하였다
[7] 부관참시(剖棺斬屍) : 직역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를 벤다. 이미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질렀던 죄상이 뒤늦게 드러난 경우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극형에 처하는 것
[8] 부관능지(剖棺凌遲) : 부관참시는 시신의 목을 자르는 것이 비해 부관능지는 시신 전체를 잘라 버린다
[9] 중종반정 (中宗反正) :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연산군은 이 사실을 왕이 되기전에 알고 있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어머니 사사사건에 직접 연루된 자와 폐비를 지지한 훈구 세력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1504년 음력 3월 20일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2] 귀인 엄(嚴)씨 · [3]귀인 정(鄭)씨를 창경궁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1년 후 사사하였다. 연산군이 할머니인 [1]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서 폭언을 하자,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달후 세상을 떠났다.
갑자사화로 인해 [4] 윤필상 · [5]이극균 · [6]이세좌를 비롯하여 여러 신하들이 극형에 처해졌다. 사화는 점점 확대되어 240여 명이 처벌받았으며 이중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7] 부관참시, [8]부관능지를 당했다고 한다.
이 사화를 계기로 더 심해진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 변동과 정치 문화를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9]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
[1]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년 ~ 1504년) : 추존 왕 덕종의 비.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2] 귀인엄씨(貴人嚴氏, ? ~ 1504년) : 성종(조선 제9대왕)의 후궁
[3] 귀인정씨(貴人鄭氏, ? ~ 1504년) : 성종(조선 제9대왕)의 후궁
[4] 윤필상(尹弼商, 1427년 ~ 1504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성종의 장인.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신진사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하고 정적을 숙청하였다. 자신도 폐비 윤씨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5] 이극균(李克均, 1437년 ~ 1504년) : 조선의 문신. 1503년에는 좌의정. 조카 이세좌와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6] 이세좌(李世佐, 1445년 ∼ 1504년): 조선의 문신.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 참석, 어사주를 회배(回盃)할 때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유배되었다. 1504년 조정에 복귀하는 듯 했지만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직접 전달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자결하였다
[7] 부관참시(剖棺斬屍) : 직역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를 벤다. 이미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질렀던 죄상이 뒤늦게 드러난 경우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극형에 처하는 것
[8] 부관능지(剖棺凌遲) : 부관참시는 시신의 목을 자르는 것이 비해 부관능지는 시신 전체를 잘라 버린다
[9] 중종반정 (中宗反正) :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조선 제10대왕, 재위 1494년~1506년)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 이역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개인사, 그리고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에 많은 원망을 사고 있던 왕이었다.
* 중종(1488년~1544년) : 조선의 제11대 왕. 재위기간은 1506년~1544년. 성종(조선의 제9대왕, 재위 : 1469년~1495년)은 조선의 제9대 왕)의 적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며 진성대군으로 봉해졌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개인사, 그리고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에 많은 원망을 사고 있던 왕이었다.
* 중종(1488년~1544년) : 조선의 제11대 왕. 재위기간은 1506년~1544년. 성종(조선의 제9대왕, 재위 : 1469년~1495년)은 조선의 제9대 왕)의 적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며 진성대군으로 봉해졌다.
고려말부터 무질서하게 들어오는 왜인들의 통제를 위해서 조선건국 이후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으로 맞서면서 1443년(세종 25)에 왜구들에게 삼포([1]부산포·[2]제포·[3]염포)에 무역 및 상업활동을 허가하는 유화책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무역과 상업활동이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4]항거 왜인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60명 정도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점차 무역이 성행하고 교류가 늘자 왜인들은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14]중종반정 이후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충돌이 잦게 되었다.
특히 [1]부산포의 [5]첨절제사 [6]이우증은 왜인들에게 가학적인 처벌을 하여 왜인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1510년 4월 4일 일본 대마도 [8]다이칸의 아들인 [9]소모리를 대장으로 약 5,000명의 왜인들을 이끌고 부산포, 제포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2]웅천과 [1]동래를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산포 [5]첨절제사인 이우증이 살해되고 제포 [5]첨절제사인 김세균(金世均)이 납치되는 등 인명 손실과 민간에 대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2]황형과 [13]유담년을 각각 [11]경상좌도방어사·[11]우도방어사로 임명하여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10년 4월 19일[2]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 동안 협공한 끝에 물리쳤다.
그 결과 [9]소모리는 사망했고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병사와 민간인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타 파괴되었으며,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사망 및 포로가 되었다.
[참조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916
- 나무위키, 위키백과 : 삼포왜란
[1] 부산포(富山浦) : 현재 부산의 동래
[2] 제포(薺浦) : 내이포(乃而浦)라고도 하며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3] 염포(鹽浦) : 현재 울산 광역시 북구 염포동
[4] 항거 왜인(恒居倭人) : 조선에 상주하는 왜인
[5] 첨절제사(僉節制使) : 지방 군영(진영)의 장수. 종3품(從三品)으로 절도사 하위관직
[6] 이우증(李友曾, ?~1510) : 1509년(중종 4) 4월 12일 부산포 첨절제사에 임명
[8] 다이칸(代官) : 일본 에도 시대의 관직 중 하나로, 다이묘 밑에서 조세 징수 및 지방 행정을 담당하던 관리, 또는 막부의 직할지를 담당하던 지방관
[9] 소모리 히로시(宗盛弘, ?~1510) :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10] 절도사(節度使) : 고려 전기 10도(道) ·12주(州)의 군사적으로 편성한 지방제도하의 지방장관
[11] 방어사(防御使) : 조선시대 군사요지인 지방에 파견하였던 관직
[12] 황형(黃衡, 1459년~1520년) : 조선전기 의주목사, 회령부사, 함경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13] 유담년(柳聃年, ?~1526년) : 조선전기 공조판서,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무신
[14] 중종반정(中宗反正) :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조선 제10대왕, 재위 1494년~1506년)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 이역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그리고 무역과 상업활동이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4]항거 왜인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60명 정도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점차 무역이 성행하고 교류가 늘자 왜인들은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14]중종반정 이후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충돌이 잦게 되었다.
특히 [1]부산포의 [5]첨절제사 [6]이우증은 왜인들에게 가학적인 처벌을 하여 왜인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1510년 4월 4일 일본 대마도 [8]다이칸의 아들인 [9]소모리를 대장으로 약 5,000명의 왜인들을 이끌고 부산포, 제포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2]웅천과 [1]동래를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산포 [5]첨절제사인 이우증이 살해되고 제포 [5]첨절제사인 김세균(金世均)이 납치되는 등 인명 손실과 민간에 대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2]황형과 [13]유담년을 각각 [11]경상좌도방어사·[11]우도방어사로 임명하여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10년 4월 19일[2]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 동안 협공한 끝에 물리쳤다.
그 결과 [9]소모리는 사망했고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병사와 민간인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타 파괴되었으며,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사망 및 포로가 되었다.
[참조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916
- 나무위키, 위키백과 : 삼포왜란
[1] 부산포(富山浦) : 현재 부산의 동래
[2] 제포(薺浦) : 내이포(乃而浦)라고도 하며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3] 염포(鹽浦) : 현재 울산 광역시 북구 염포동
[4] 항거 왜인(恒居倭人) : 조선에 상주하는 왜인
[5] 첨절제사(僉節制使) : 지방 군영(진영)의 장수. 종3품(從三品)으로 절도사 하위관직
[6] 이우증(李友曾, ?~1510) : 1509년(중종 4) 4월 12일 부산포 첨절제사에 임명
[8] 다이칸(代官) : 일본 에도 시대의 관직 중 하나로, 다이묘 밑에서 조세 징수 및 지방 행정을 담당하던 관리, 또는 막부의 직할지를 담당하던 지방관
[9] 소모리 히로시(宗盛弘, ?~1510) :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10] 절도사(節度使) : 고려 전기 10도(道) ·12주(州)의 군사적으로 편성한 지방제도하의 지방장관
[11] 방어사(防御使) : 조선시대 군사요지인 지방에 파견하였던 관직
[12] 황형(黃衡, 1459년~1520년) : 조선전기 의주목사, 회령부사, 함경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13] 유담년(柳聃年, ?~1526년) : 조선전기 공조판서,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무신
[14] 중종반정(中宗反正) :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조선 제10대왕, 재위 1494년~1506년)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 이역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김정·김식 등 신진사림세력이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세력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1506년 훈구세력인 성희안, 박원종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조선의 11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훈구반정세력으로 즉위한 중종은 집권 초기에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이에 중종은 공신들의 팽창을 억누르려고 사림 세력을 등용한다.
이에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은 초기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그를 총애하였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기피하고 불신하였다.
특히 조광조 등 급진 사림파는 초기 공신의 일부 인원을 가짜공신이라 지적하면서 등급 및 역할에 따라 공신훈적이 삭제되자 훈구세력인 남곤·심정·홍경주등의 반발과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이에 훈구파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은 궁궐 후원 나무잎에 '주초위왕(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이라는 글자를 나타나게 함으로써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사림파세력은 역모로 몰려 파면되어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는 개혁 사림파들이 보수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화를 입은 구도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중종이 있었다. 중종은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피로를 느꼈고 공신들의 등급 개정안을 보고 더욱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주초위왕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연산군(1476년~1506년) : 조선의 제10대 국왕(재위 : 1495년~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 중종(1488년~1544년) : 조선의 제11대 국왕(재위: 1506년 ~ 1544년)
* 김종직(1431년~1492년) :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특히 사림파의 실질적인 종주이며 사림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 김굉필(1454년~1504년) :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이다. 정여창·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
* 조광조(1482년~1520년) :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1506년 훈구세력인 성희안, 박원종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조선의 11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훈구반정세력으로 즉위한 중종은 집권 초기에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이에 중종은 공신들의 팽창을 억누르려고 사림 세력을 등용한다.
이에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은 초기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그를 총애하였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기피하고 불신하였다.
특히 조광조 등 급진 사림파는 초기 공신의 일부 인원을 가짜공신이라 지적하면서 등급 및 역할에 따라 공신훈적이 삭제되자 훈구세력인 남곤·심정·홍경주등의 반발과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이에 훈구파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은 궁궐 후원 나무잎에 '주초위왕(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이라는 글자를 나타나게 함으로써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사림파세력은 역모로 몰려 파면되어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는 개혁 사림파들이 보수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화를 입은 구도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중종이 있었다. 중종은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피로를 느꼈고 공신들의 등급 개정안을 보고 더욱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주초위왕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연산군(1476년~1506년) : 조선의 제10대 국왕(재위 : 1495년~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 중종(1488년~1544년) : 조선의 제11대 국왕(재위: 1506년 ~ 1544년)
* 김종직(1431년~1492년) :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특히 사림파의 실질적인 종주이며 사림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 김굉필(1454년~1504년) :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이다. 정여창·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
* 조광조(1482년~1520년) :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
독일 농민전쟁은 독일 남부와 중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농민 봉기로, 유럽 중세 말기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종교 개혁의 영향이 복합적인 영향으로 일어났다. 이는 중세적 봉건 질서에 대한 농민 계층의 집단적 저항으로 [1]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맞물리며 당시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1]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와 같은 개념을 통해 농민들에게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의 언어를 제공하였다. 특히, [2]토마스 뮌처와 같은 급진 종교개혁자들은 평등과 무계급 사회를 주장하며 농민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내 제후와 귀족들 사이의 권력 투쟁과 지방 자치의 억제 등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황제 [6]카를 5세와 지역 제후 간의 정치적 갈등도 사회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1524년에 [5]슈바벤 지역에서 농민들의 항쟁으로 농민전쟁이 시작되었고, 곧 프랑켄, 튀링겐, 엘자스, 바덴, 잘츠부르크 등지로 확산되었다. 1525년초, 약 30만 명의 농민이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과도한 세금과 부역의 철폐, 농민들의 사냥·어업권 보장, 자유로운 성직자 선출, 영주의 억압 철폐, 공동 목초지 사용권 인정 등으로 구성된 '12개조 요구서'로 영주들에게 요구하였다. [2]토마스 뮌처는 종교적·사회주의적 사상이 강한 지도자로 농민들과 함께 항쟁을 주도했다.
[3]슈바벤 동맹을 비롯한 제후군은 조직적이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농민군을 차례로 진압하였다. 1525년 5월 [4]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2]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이 패배하여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되었고, 토마스 뮌처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면서 농민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전쟁은 농민들의 패배로 끝났고 약 10만 명 이상의 농민이 전사 또는 처형당했다. 농민 계층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고 봉건 질서는 더욱 공고해졌다.
독일 농민전쟁은 단순한 경제적 봉기가 아닌 사회 구조의 변화와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 운동이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유럽 역사에서 민중 의식과 민주주의 발달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 ~ 1546년 2월 18일) : 독일의 종교개혁가.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개신교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그는 성경 중심의 신앙과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지만 농민전쟁에서는 질서를 강조하며 농민들의 폭력적 봉기를 반대하였다.
[2]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 : 독일의 급진 종교개혁가이자 독일 농민전쟁의 지도자였다. 그는 신의 뜻에 따른 평등 사회를 주장하며 농민 봉기를 이끌었으나 1525년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패배 후 처형되었다.
[3] 슈바벤 동맹(Swabian League) : 1488년에 만들어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가들의 상호방위동맹. 동맹이 결성된 곳은 슈바벤 공국이다.
[4] 프랑켄하우젠 전투 : 1525년 5월 15일 독일 농민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로,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이 제후 연합군에 의해 참패한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되었고, 뮌처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면서 농민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5] 슈바벤(Schwaben) : 오늘날 독일 남서부에 해당하며 주로 바이에른 주 남서부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울름(Ulm),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등이 있으며, 전통적으로 슈바벤어(독일어의 방언)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슈바벤 공국이나 슈바벤 동맹 등의 이름으로도 자주 등장했다.
[6] 카를 5세(Karl V, 1500년 2월 24일 ~ 1558년 9월 21일) : 신성 로마 제국 제3대 황제(재위 :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
[1]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와 같은 개념을 통해 농민들에게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의 언어를 제공하였다. 특히, [2]토마스 뮌처와 같은 급진 종교개혁자들은 평등과 무계급 사회를 주장하며 농민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내 제후와 귀족들 사이의 권력 투쟁과 지방 자치의 억제 등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황제 [6]카를 5세와 지역 제후 간의 정치적 갈등도 사회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1524년에 [5]슈바벤 지역에서 농민들의 항쟁으로 농민전쟁이 시작되었고, 곧 프랑켄, 튀링겐, 엘자스, 바덴, 잘츠부르크 등지로 확산되었다. 1525년초, 약 30만 명의 농민이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과도한 세금과 부역의 철폐, 농민들의 사냥·어업권 보장, 자유로운 성직자 선출, 영주의 억압 철폐, 공동 목초지 사용권 인정 등으로 구성된 '12개조 요구서'로 영주들에게 요구하였다. [2]토마스 뮌처는 종교적·사회주의적 사상이 강한 지도자로 농민들과 함께 항쟁을 주도했다.
[3]슈바벤 동맹을 비롯한 제후군은 조직적이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농민군을 차례로 진압하였다. 1525년 5월 [4]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2]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이 패배하여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되었고, 토마스 뮌처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면서 농민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전쟁은 농민들의 패배로 끝났고 약 10만 명 이상의 농민이 전사 또는 처형당했다. 농민 계층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고 봉건 질서는 더욱 공고해졌다.
독일 농민전쟁은 단순한 경제적 봉기가 아닌 사회 구조의 변화와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 운동이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유럽 역사에서 민중 의식과 민주주의 발달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 ~ 1546년 2월 18일) : 독일의 종교개혁가.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개신교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그는 성경 중심의 신앙과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지만 농민전쟁에서는 질서를 강조하며 농민들의 폭력적 봉기를 반대하였다.
[2]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 : 독일의 급진 종교개혁가이자 독일 농민전쟁의 지도자였다. 그는 신의 뜻에 따른 평등 사회를 주장하며 농민 봉기를 이끌었으나 1525년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패배 후 처형되었다.
[3] 슈바벤 동맹(Swabian League) : 1488년에 만들어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가들의 상호방위동맹. 동맹이 결성된 곳은 슈바벤 공국이다.
[4] 프랑켄하우젠 전투 : 1525년 5월 15일 독일 농민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로,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이 제후 연합군에 의해 참패한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되었고, 뮌처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면서 농민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5] 슈바벤(Schwaben) : 오늘날 독일 남서부에 해당하며 주로 바이에른 주 남서부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울름(Ulm),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등이 있으며, 전통적으로 슈바벤어(독일어의 방언)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슈바벤 공국이나 슈바벤 동맹 등의 이름으로도 자주 등장했다.
[6] 카를 5세(Karl V, 1500년 2월 24일 ~ 1558년 9월 21일) : 신성 로마 제국 제3대 황제(재위 :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중남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이며,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 세운 국가이다.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전투로,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1]술탄 [2]쉴레이만 1세는 유럽으로의 세력 확장을 목표로 헝가리를 침공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국왕 [3]러요시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이에 맞섰다.
양측은 [4]모하치 평원에서 격돌했으며, 오스만군은 대규모 병력과 정교한 전술로 헝가리군을 압도했다. 헝가리군은 수적 열세와 전술적 한계로 인해 크게 패배했으며, 라요슈 2세를 포함한 다수의 귀족과 군인이 전사했다. 이 전투로 헝가리 왕국은 사실상 몰락했고, 이후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분열되며 약 150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모하치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유럽 진출을 촉진한 동시에, 유럽에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력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이후 제1차 빈 공방전(1529) 등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충돌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 술탄(Sultan) : 주로 이슬람 세계에서 사용된 군주 칭호로, 아랍어로 "권위" 또는 "권력"을 의미한다
[2] 쉴레이만 1세(Suleiman the Magnificent, 1494년 11월 6일~1566년 9월 5일) :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재위 1520년 9월 22일~1566년 9월 5일)으로, 제국의 군사적·문화적 황금기를 이끌며 법 제도 개혁과 영토 확장을 통해 "위대한 통치자"로 칭송받았다
[3] 러요시 2세(Louis II, 1506년 7월 1일~1526년 8월 29일)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516년 ~ 1526년).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4] 모하치(Mohács) : 오늘날 헝가리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다뉴브강 인근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 간의 중요한 전투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1]술탄 [2]쉴레이만 1세는 유럽으로의 세력 확장을 목표로 헝가리를 침공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국왕 [3]러요시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이에 맞섰다.
양측은 [4]모하치 평원에서 격돌했으며, 오스만군은 대규모 병력과 정교한 전술로 헝가리군을 압도했다. 헝가리군은 수적 열세와 전술적 한계로 인해 크게 패배했으며, 라요슈 2세를 포함한 다수의 귀족과 군인이 전사했다. 이 전투로 헝가리 왕국은 사실상 몰락했고, 이후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분열되며 약 150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모하치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유럽 진출을 촉진한 동시에, 유럽에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력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이후 제1차 빈 공방전(1529) 등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충돌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 술탄(Sultan) : 주로 이슬람 세계에서 사용된 군주 칭호로, 아랍어로 "권위" 또는 "권력"을 의미한다
[2] 쉴레이만 1세(Suleiman the Magnificent, 1494년 11월 6일~1566년 9월 5일) :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재위 1520년 9월 22일~1566년 9월 5일)으로, 제국의 군사적·문화적 황금기를 이끌며 법 제도 개혁과 영토 확장을 통해 "위대한 통치자"로 칭송받았다
[3] 러요시 2세(Louis II, 1506년 7월 1일~1526년 8월 29일)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516년 ~ 1526년).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4] 모하치(Mohács) : 오늘날 헝가리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다뉴브강 인근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 간의 중요한 전투지로 알려져 있다
1529년 제1차 빈 공방전은 [2]오스만 제국의 유럽 확장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4]술탄 [5]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군대가 [1]신성로마 제국의 수도 빈을 포위하며 벌어진 대규모 공성전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1526년 [3]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정복하면서 발칸 반도를 넘어 서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빈은 유럽 방어의 핵심적인 거점으로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상징적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5]쉴레이만 1세는 약 12만 명의 대군과 공성 무기, 대포 등 강력한 장비를 동원하여 빈으로 진격했다. 오스만군의 군사적 목표는 빈을 점령해 신성로마 제국의 중심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빈 방어를 맡은 병력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 [6]카를 5세와 약 2만 명의 수비군과 빈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포위전에 대비해 성벽을 강화하고 방어선을 촘촘히 구축했다. 유럽 각지에서 온 지원군도 빈으로 집결하며 사기를 높였다.
9월에 시작된 포위전에서 오스만군은 강력한 공성 장비를 이용해 빈의 성벽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빈 수비군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특히 빈의 수비군은 도시 외곽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에서도 방어선을 유지하며 오스만군의 전력을 소모시켰다. 오스만군은 여러 차례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도시 방어망의 강력함과 유럽의 지원군 합류로 인해 계획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결국 오스만군은 10월 중순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는 보급 문제와 혹독한 추위, 수비군의 강력한 저항이 주요 원인이었다. 오스만군은 빈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발칸 반도와 헝가리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며 유럽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았다.
이 전투는 여러 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우선, 빈을 방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저지하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신성로마 제국은 유럽 방어의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했고, 기독교 서유럽과 이슬람 오스만 제국 간의 대립 구도가 명확해졌다. 또한, 이 전투는 유럽 국가들 간의 연대와 협력이 전략적으로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제1차 빈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세를 유럽에 각인시키는 동시에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정복을 시도했으나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또다시 실패하며 유럽에서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되었다.
[1] 신성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 : 962년부터 1806년까지 중앙유럽을 중심으로 존재한 다민족적 연합체로 기독교적 정통성과 황제권을 바탕으로 유럽의 정치·종교적 중심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며 해체되었다.
[2]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 1299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진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영토와 문화를 가진 제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으며 1923년 오늘날의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모하치 전투(Battle of Mohács) : 1526년 8월 29일 헝가리의 모하치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이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패배시키며 중앙유럽으로의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헝가리 왕국의 몰락과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촉발한 역사적 전환점이다
[4] 술탄(Sultan) : 주로 이슬람 세계에서 사용된 군주 칭호이며 아랍어로 "권위" 또는 "권력"을 의미한다
[5] 쉴레이만 1세(Suleiman the Magnificent, 1494년 11월 6일~1566년 9월 5일) :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재위 1520년 9월 22일~1566년 9월 5일)으로 제국의 군사적·문화적 황금기를 이끌며 법 제도 개혁과 영토 확장을 통해 "위대한 통치자"로 칭송받았다.
[6] 카를 5세(Charles V, 1500년 2월 24일~1558년 9월 21일))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3대 황제(재위 1519년 6월 28일~1556년 8월 27일)
당시 오스만 제국은 1526년 [3]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정복하면서 발칸 반도를 넘어 서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빈은 유럽 방어의 핵심적인 거점으로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상징적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5]쉴레이만 1세는 약 12만 명의 대군과 공성 무기, 대포 등 강력한 장비를 동원하여 빈으로 진격했다. 오스만군의 군사적 목표는 빈을 점령해 신성로마 제국의 중심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빈 방어를 맡은 병력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 [6]카를 5세와 약 2만 명의 수비군과 빈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포위전에 대비해 성벽을 강화하고 방어선을 촘촘히 구축했다. 유럽 각지에서 온 지원군도 빈으로 집결하며 사기를 높였다.
9월에 시작된 포위전에서 오스만군은 강력한 공성 장비를 이용해 빈의 성벽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빈 수비군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특히 빈의 수비군은 도시 외곽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에서도 방어선을 유지하며 오스만군의 전력을 소모시켰다. 오스만군은 여러 차례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도시 방어망의 강력함과 유럽의 지원군 합류로 인해 계획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결국 오스만군은 10월 중순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는 보급 문제와 혹독한 추위, 수비군의 강력한 저항이 주요 원인이었다. 오스만군은 빈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발칸 반도와 헝가리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며 유럽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았다.
이 전투는 여러 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우선, 빈을 방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저지하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신성로마 제국은 유럽 방어의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했고, 기독교 서유럽과 이슬람 오스만 제국 간의 대립 구도가 명확해졌다. 또한, 이 전투는 유럽 국가들 간의 연대와 협력이 전략적으로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제1차 빈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세를 유럽에 각인시키는 동시에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정복을 시도했으나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또다시 실패하며 유럽에서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되었다.
[1] 신성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 : 962년부터 1806년까지 중앙유럽을 중심으로 존재한 다민족적 연합체로 기독교적 정통성과 황제권을 바탕으로 유럽의 정치·종교적 중심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며 해체되었다.
[2]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 1299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진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영토와 문화를 가진 제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으며 1923년 오늘날의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모하치 전투(Battle of Mohács) : 1526년 8월 29일 헝가리의 모하치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이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패배시키며 중앙유럽으로의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헝가리 왕국의 몰락과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촉발한 역사적 전환점이다
[4] 술탄(Sultan) : 주로 이슬람 세계에서 사용된 군주 칭호이며 아랍어로 "권위" 또는 "권력"을 의미한다
[5] 쉴레이만 1세(Suleiman the Magnificent, 1494년 11월 6일~1566년 9월 5일) :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재위 1520년 9월 22일~1566년 9월 5일)으로 제국의 군사적·문화적 황금기를 이끌며 법 제도 개혁과 영토 확장을 통해 "위대한 통치자"로 칭송받았다.
[6] 카를 5세(Charles V, 1500년 2월 24일~1558년 9월 21일))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3대 황제(재위 1519년 6월 28일~1556년 8월 27일)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소윤(小尹,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대립으로 일어나 소윤에 의하여 대윤이 숙청된 사건
1545년(명종 즉위년)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소윤(小尹,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대립으로 일어나 소윤에 의하여 대윤이 숙청된 사건
위그노 전쟁은 16세기 프랑스에서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인 [1]위그노간의 치열한 종교적·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종교전쟁이며 1562년부터 1598년까지 약 36년에 걸쳐 총 여덟 차례의 전쟁이 이어졌다. 프랑스 종교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쟁은 단순한 종교 분쟁을 넘어 귀족 세력 간의 권력 투쟁과 왕권 강화 시도, 외세의 개입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장 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갈등의 직접적인 발단은 1562년 3월 1일 바시에서 [4]프랑수아 기즈 공이 신교도 예배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1]위그노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위그노를 중심으로 한 [15]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가톨릭의 핵심세력인 기즈 가문 사이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5]앙리 2세의 사망 이후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문제와 [6]카트린 드 메디시스 섭정하에 쇠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1572년 8월 24일 [8]성 바르톨로메오 축일부터 벌어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위그노 전쟁의 가장 참혹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위그노 지도자 [7]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암살을 시작으로 파리 전역에 걸친 신교도 대학살로 이어졌으며 단순한 유혈 사태를 넘어 종교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대학살의 충격은 프랑스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깊은 공포와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도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간의 충돌은 간헐적인 무력 충돌과 불안정한 평화 협상이 반복되면서 지속되었고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1]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가톨릭 귀족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598년에는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에게 일정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 칙령은 일정 지역 내에서 위그노 신앙 실천을 허용하며 왕권과 사회 안정 사이의 절충점을 모색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카톨릭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에 [12]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13]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9]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10]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위그노 전쟁은 단지 프랑스 내부의 종교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전반에 걸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운동의 일환이었으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형성과 종교 관용 개념의 제도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François de Guise, 1519년 2월 17일 ~ 1563년 2월 24일) : 가톨릭 중심 세력을 이끄는 프랑스 귀족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위그노 탄압과 종교 전쟁의 중심 인물이었다. 1562년 바시 학살을 일으켜 위그노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왕실 내 권력을 장악했으나 위그노 측에 의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5] 앙리 2세(Henry II of France, 1519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 프랑스 발루아 왕조 제2대 국왕(재위, 1547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당시 유럽을 휩쓸던 종교개혁을 반대했다
[6]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 1519년 4월 13일 ~ 1589년 1월 5일) : 앙리 2세의 왕비이자 세 아들의 섭정으로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갈등 속에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7]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Gaspard II de Coligny, 1519년 2월 16일 ~ 1572년 8월 24일) : 프랑스의 제독이자 위그노 전쟁 초기의 개신교 지도자.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에서 살해당했다
[8]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 :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
[9]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10]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 4세부터 앙리 5세까지의 왕조
[11] 앙리 4세(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12]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13]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14] 관용칙령 : 1787년 11월 7일에 반포된 법령으로 프랑스 내 비가톨릭교도들에게 일정한 시민적 권리를 부여한 조치이다. 이 칙령은 개신교도(주로 위그노)와 유대인 등에게 결혼, 출생, 사망의 법적 등록, 재산 상속, 시민권 등록 등을 허용하였다
[15] 프로테스탄트 귀족(Protestant nobles, nobles huguenots) :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 내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를 수용한 고위 귀족층을 지칭하며, 이들은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과 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종종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장 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갈등의 직접적인 발단은 1562년 3월 1일 바시에서 [4]프랑수아 기즈 공이 신교도 예배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1]위그노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위그노를 중심으로 한 [15]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가톨릭의 핵심세력인 기즈 가문 사이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5]앙리 2세의 사망 이후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문제와 [6]카트린 드 메디시스 섭정하에 쇠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1572년 8월 24일 [8]성 바르톨로메오 축일부터 벌어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위그노 전쟁의 가장 참혹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위그노 지도자 [7]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암살을 시작으로 파리 전역에 걸친 신교도 대학살로 이어졌으며 단순한 유혈 사태를 넘어 종교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대학살의 충격은 프랑스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깊은 공포와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도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간의 충돌은 간헐적인 무력 충돌과 불안정한 평화 협상이 반복되면서 지속되었고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1]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가톨릭 귀족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598년에는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에게 일정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 칙령은 일정 지역 내에서 위그노 신앙 실천을 허용하며 왕권과 사회 안정 사이의 절충점을 모색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카톨릭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에 [12]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13]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9]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10]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위그노 전쟁은 단지 프랑스 내부의 종교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전반에 걸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운동의 일환이었으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형성과 종교 관용 개념의 제도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François de Guise, 1519년 2월 17일 ~ 1563년 2월 24일) : 가톨릭 중심 세력을 이끄는 프랑스 귀족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위그노 탄압과 종교 전쟁의 중심 인물이었다. 1562년 바시 학살을 일으켜 위그노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왕실 내 권력을 장악했으나 위그노 측에 의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5] 앙리 2세(Henry II of France, 1519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 프랑스 발루아 왕조 제2대 국왕(재위, 1547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당시 유럽을 휩쓸던 종교개혁을 반대했다
[6]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 1519년 4월 13일 ~ 1589년 1월 5일) : 앙리 2세의 왕비이자 세 아들의 섭정으로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갈등 속에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7]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Gaspard II de Coligny, 1519년 2월 16일 ~ 1572년 8월 24일) : 프랑스의 제독이자 위그노 전쟁 초기의 개신교 지도자.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에서 살해당했다
[8]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 :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
[9]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10]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 4세부터 앙리 5세까지의 왕조
[11] 앙리 4세(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12]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13]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14] 관용칙령 : 1787년 11월 7일에 반포된 법령으로 프랑스 내 비가톨릭교도들에게 일정한 시민적 권리를 부여한 조치이다. 이 칙령은 개신교도(주로 위그노)와 유대인 등에게 결혼, 출생, 사망의 법적 등록, 재산 상속, 시민권 등록 등을 허용하였다
[15] 프로테스탄트 귀족(Protestant nobles, nobles huguenots) :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 내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를 수용한 고위 귀족층을 지칭하며, 이들은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과 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종종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기독교 국가 연합군([2]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해군이 벌인 역사적인 해전이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하고 유럽 기독교 세력이 단결하여 거둔 중요한 승리로 평가된다. 전투는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3]나프팍토스(Nafpaktos, 당시 레판토) 근해에서 벌어졌으며, 16세기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해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5]교황 비오 5세는 [6]펠리페 2세가 통치하는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1]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신성 동맹을 조직하였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스페인의 [7]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맡았고, 오스만 해군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이끌었다.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이 전열을 갖추고 오스만 해군과 직접 충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오스만군은 중앙에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신성 동맹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반격을 감행했다. 특히 기독교 연합군의 [9]갤리어스함선이 제공한 강력한 포격과, 베네치아 및 스페인 [10]갤리선들의 근접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2]신성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오스만 제국 해군의 200여 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특히 오스만 해군의 총사령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독교 연합군으로 기울었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몇 년 만에 빠르게 회복하여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중요한 전투로, 기독교 연합군이 단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한 역사적 사건이다. 비록 이 승리가 오스만 제국의 해양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유럽 국가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울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지중해의 해양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이후 유럽 해군 전략과 전술 발전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 간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교황령(Papal States) :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 교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 베드로 세습령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건국함으로써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2] 신성동맹 : 지중해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교황 비오 5세가 주동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주요 카톨릭 국가들이 1571년 5월 25일에 결성한 군사동맹
[3] 나프팍토스(Nafpaktos) :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도시. 코린토스 만의 접근을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중용한 도시
[4] 코린토스 만 : 펠로폰네소스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
[5]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 1504년 1월 17일~1572년 5월 1일) : 제225대 교황, 재위: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
[6]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 1월 16일~1598년 9월 13일
[7]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으로 스페인의 장군. 레판토 해전의 신성 동맹 함대 총사령관
[8]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Müezzinzade Ali Pasha, ? ~1571년 10월 7일) :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전사한 총사령관
[9] 갤리어스(Galleass) : 갤리온(Galleon, 16~18세기에 주로 사용된 대형 범선으로 긴 선체, 높은 선수·선미, 여러 개의 돛대, 그리고 강력한 대포를 갖춘 것이 특징)의 돛과 무장과 노를 젓는 갤리의 기동성을 결합한 전함
[10] 갤리(Galley) : 노를 젓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긴 선체의 군함 또는 선박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18세기까지 주로 지중해와 유럽 해역에서 군사 및 무역 용도로 사용되었다. 갤리는 한 개 이상의 돛과 다수의 노(rowers)를 갖춘 것이 특징으로, 특히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로마, 그리스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5]교황 비오 5세는 [6]펠리페 2세가 통치하는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1]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신성 동맹을 조직하였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스페인의 [7]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맡았고, 오스만 해군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이끌었다.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이 전열을 갖추고 오스만 해군과 직접 충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오스만군은 중앙에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신성 동맹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반격을 감행했다. 특히 기독교 연합군의 [9]갤리어스함선이 제공한 강력한 포격과, 베네치아 및 스페인 [10]갤리선들의 근접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2]신성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오스만 제국 해군의 200여 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특히 오스만 해군의 총사령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독교 연합군으로 기울었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몇 년 만에 빠르게 회복하여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중요한 전투로, 기독교 연합군이 단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한 역사적 사건이다. 비록 이 승리가 오스만 제국의 해양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유럽 국가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울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지중해의 해양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이후 유럽 해군 전략과 전술 발전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 간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교황령(Papal States) :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 교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 베드로 세습령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건국함으로써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2] 신성동맹 : 지중해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교황 비오 5세가 주동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주요 카톨릭 국가들이 1571년 5월 25일에 결성한 군사동맹
[3] 나프팍토스(Nafpaktos) :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도시. 코린토스 만의 접근을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중용한 도시
[4] 코린토스 만 : 펠로폰네소스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
[5]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 1504년 1월 17일~1572년 5월 1일) : 제225대 교황, 재위: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
[6]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 1월 16일~1598년 9월 13일
[7]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으로 스페인의 장군. 레판토 해전의 신성 동맹 함대 총사령관
[8]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Müezzinzade Ali Pasha, ? ~1571년 10월 7일) :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전사한 총사령관
[9] 갤리어스(Galleass) : 갤리온(Galleon, 16~18세기에 주로 사용된 대형 범선으로 긴 선체, 높은 선수·선미, 여러 개의 돛대, 그리고 강력한 대포를 갖춘 것이 특징)의 돛과 무장과 노를 젓는 갤리의 기동성을 결합한 전함
[10] 갤리(Galley) : 노를 젓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긴 선체의 군함 또는 선박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18세기까지 주로 지중해와 유럽 해역에서 군사 및 무역 용도로 사용되었다. 갤리는 한 개 이상의 돛과 다수의 노(rowers)를 갖춘 것이 특징으로, 특히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로마, 그리스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과의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 아니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출처] : 리브레위키 - 영국-스페인전쟁(https://librewiki.net/wiki/%EC%98%81%EA%B5%AD-%EC%8A%A4%ED%8E%98%EC%9D%B8_%EC%A0%84%EC%9F%81)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출처] : 리브레위키 - 영국-스페인전쟁(https://librewiki.net/wiki/%EC%98%81%EA%B5%AD-%EC%8A%A4%ED%8E%98%EC%9D%B8_%EC%A0%84%EC%9F%81)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
칼레해전은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의 주요 전투이며 영국의 해적이자 제독인 [1]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약 100년동안 신대륙은 최고의 해양강국 스페인의 독무대였다. 여기에는 아르마다(Armada)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해적들은 신대륙으로부터 물자를 싣고오는 스페인의 상선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대표적인 영국 해적으로 [1]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이에 스페인이 영국에 해적을 소탕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당시 [6]엘리자베스1세 잉글랜드 여왕은 오히려 해적활동을 통하여 국가재정에 기여한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영국 해군으로 발탁한다. 또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종교문제 갈등이 더해져 영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1588년 5월 30일 스페인의 [7]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하에 대규모의 무적함대가 리스본 항구에서 영국을 향해 출항한다.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지상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2]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으나 심한 폭풍때문에 영국쪽으로 북상하였다. 7월 중순에 영국해협 서쪽에 도착한 스페인 함대는 [3]플리머스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몇차례 더 교전을 하였다.
이 교전에서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는 승리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았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8월 8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불길이 치솟자 당황하여 군함의 닻줄을 급히 자르고 출항하였다.
이 때문에 스페인 함대의 전형은 흐트러졌고 이 틈을 타서 영국 함대는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스페인 전함들은 속수무책으로 침몰되었다. 이 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려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스코틀랜드에 정박할 것을 간파한 [6]엘리자베스1세의 계략으로 스페인군은 스코틀랜드항구에 입항조차 못하였다. 때문에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군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굶주린 스페인군은 아일랜드에 정박하여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미리 예상한 영국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스페인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 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잃으면서 해양 패권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2] 플랜더스(Flanders) : 현재의 벨기에의 서부, 프랑스의 북부, 네덜란의 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지방
[3] 플리머스(Plymouth) : 영국 잉글랜드 데번주의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 도시로서 영국 해군의 근거지
[4] 도버 해협(Strait of Dover) :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잇는 잉글랜드 해협의 일부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최단 루트이기도 하다. 도버 해협을 기준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거리는 대략 34km 정도에 불과하다. 달리 영불해협이라고 하기도 한다
[5]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연안 저지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보통 본명보다는 작위인 '파르마 공'으로 더 많이 불린다
[6]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7]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 1380년이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작령을 보유한 메디나-시도니아에 있는 스페인의 대작 칭호. 무적함대를 지위했던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약 100년동안 신대륙은 최고의 해양강국 스페인의 독무대였다. 여기에는 아르마다(Armada)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해적들은 신대륙으로부터 물자를 싣고오는 스페인의 상선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대표적인 영국 해적으로 [1]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이에 스페인이 영국에 해적을 소탕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당시 [6]엘리자베스1세 잉글랜드 여왕은 오히려 해적활동을 통하여 국가재정에 기여한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영국 해군으로 발탁한다. 또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종교문제 갈등이 더해져 영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1588년 5월 30일 스페인의 [7]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하에 대규모의 무적함대가 리스본 항구에서 영국을 향해 출항한다.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지상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2]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으나 심한 폭풍때문에 영국쪽으로 북상하였다. 7월 중순에 영국해협 서쪽에 도착한 스페인 함대는 [3]플리머스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몇차례 더 교전을 하였다.
이 교전에서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는 승리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았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8월 8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불길이 치솟자 당황하여 군함의 닻줄을 급히 자르고 출항하였다.
이 때문에 스페인 함대의 전형은 흐트러졌고 이 틈을 타서 영국 함대는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스페인 전함들은 속수무책으로 침몰되었다. 이 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려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스코틀랜드에 정박할 것을 간파한 [6]엘리자베스1세의 계략으로 스페인군은 스코틀랜드항구에 입항조차 못하였다. 때문에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군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굶주린 스페인군은 아일랜드에 정박하여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미리 예상한 영국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스페인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 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잃으면서 해양 패권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2] 플랜더스(Flanders) : 현재의 벨기에의 서부, 프랑스의 북부, 네덜란의 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지방
[3] 플리머스(Plymouth) : 영국 잉글랜드 데번주의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 도시로서 영국 해군의 근거지
[4] 도버 해협(Strait of Dover) :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잇는 잉글랜드 해협의 일부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최단 루트이기도 하다. 도버 해협을 기준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거리는 대략 34km 정도에 불과하다. 달리 영불해협이라고 하기도 한다
[5]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연안 저지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보통 본명보다는 작위인 '파르마 공'으로 더 많이 불린다
[6]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7]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 1380년이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작령을 보유한 메디나-시도니아에 있는 스페인의 대작 칭호. 무적함대를 지위했던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다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약1,000여명의 동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호남)하여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으나 서인세력에 의해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정여립역모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역모로 인하여 정여립은 피신하던 중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사실로 단정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에 따르면 조작설등 여러가지 주장이 공존하고 있으나 정설은 없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지면서 3년여간 정여립과 연루되어 희생된 동인은 약1,0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멸문했다
정여립(1546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1544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수장
동인 :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당파
대동계(大同契) : 조선시대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증거로 거론된 계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호남)하여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으나 서인세력에 의해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정여립역모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역모로 인하여 정여립은 피신하던 중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사실로 단정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에 따르면 조작설등 여러가지 주장이 공존하고 있으나 정설은 없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지면서 3년여간 정여립과 연루되어 희생된 동인은 약1,0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멸문했다
정여립(1546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1544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수장
동인 :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당파
대동계(大同契) : 조선시대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증거로 거론된 계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그리고 명나라가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동아시아는 7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591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는 데 조선이 길을 인도하라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약 20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17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시켰다. 이후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7월 9일 개성까지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 평양으로 피신했던 조선 왕인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였고 평양성은 60일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연속되는 전투에서 명나라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명나라는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결국은 1596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재침하였다. 1년후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은 1598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었으며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명나라군,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은 풍신수길정벌,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른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년~1598년) :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 선조(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1608년
* 의주군 : 평안북도 북서쪽의 압록강에 접한 군. 임진왜란당시 선조의 피신처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중국 최후의 한족 왕조
1591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는 데 조선이 길을 인도하라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약 20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17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시켰다. 이후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7월 9일 개성까지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 평양으로 피신했던 조선 왕인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였고 평양성은 60일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연속되는 전투에서 명나라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명나라는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결국은 1596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재침하였다. 1년후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은 1598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었으며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명나라군,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은 풍신수길정벌,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른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년~1598년) :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 선조(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1608년
* 의주군 : 평안북도 북서쪽의 압록강에 접한 군. 임진왜란당시 선조의 피신처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중국 최후의 한족 왕조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일본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임진왜란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이에 송상현은
"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은 공격을 시작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와 충절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이는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송상현(1551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의 장수.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 정발(1553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부산진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부사 : 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부, 목, 군, 현의 체제였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중의 한명
*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일본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임진왜란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이에 송상현은
"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은 공격을 시작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와 충절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이는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송상현(1551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의 장수.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 정발(1553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부산진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부사 : 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부, 목, 군, 현의 체제였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중의 한명
*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1592년(선조 25년) 5월 부산 앞바다를 뒤덮었던 일본군은 불과 20일만에 무방비상태의 조선 국토의 절반을 휩쓸었다.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거제시 동쪽에 위치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며 조선군의 최초승전이다
* 옥포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 도도 다카토라(1556년~1630년) : 센고쿠 시대 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다이묘(일본 지방의 영주)
* 센고쿠 시대 :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 일본 전국 시대이라고 한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거제시 동쪽에 위치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며 조선군의 최초승전이다
* 옥포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 도도 다카토라(1556년~1630년) : 센고쿠 시대 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다이묘(일본 지방의 영주)
* 센고쿠 시대 :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 일본 전국 시대이라고 한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
[1]사천해전은 일본수군 13척이 격침되었고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던 해전이다.
일본 수군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하는 등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이순신은 7월 6일 거제를 출발하여 7월 8일 노량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4]원균과 합류하여 사천으로 이동중 왜선 1척을 발견하여 격침시킨 뒤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해안가 선창에는 왜선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으로 일본 수군이 먼 바다까지 좇아오자 조선 수군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으로 [2]이언량, [3]이기남이 지휘를 한 거북선이 맡았으며, 그 뒤를 이은 판옥선들이 화포공격을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 함대는 사천 포구쪽으로 도주하였고 10척이 격침되었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왜선 2척은 남겨 놓았다.
나머지 2척으로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어 왜선 13척 모두 격침되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은 최전방 돌격선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5]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위용을 떨치게 된다.
[1] 사천시 : 경상남도 서남부에 있는 도시이 1995년 5월 10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었다
[2] 이언량(李彦良, ? ~ 1598년) :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1592년 6월 16일(5월 7일)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해전에서 거북선 우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 이기남(李奇男) :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당포(唐浦)해전에 거북선 돌격장,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우귀선 돌격장은 박이량이었다
[4] 원균(元均, 1540년~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5] 한산도대첩 :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학익진 전술로 유명하다.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일본 수군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하는 등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이순신은 7월 6일 거제를 출발하여 7월 8일 노량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4]원균과 합류하여 사천으로 이동중 왜선 1척을 발견하여 격침시킨 뒤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해안가 선창에는 왜선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으로 일본 수군이 먼 바다까지 좇아오자 조선 수군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으로 [2]이언량, [3]이기남이 지휘를 한 거북선이 맡았으며, 그 뒤를 이은 판옥선들이 화포공격을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 함대는 사천 포구쪽으로 도주하였고 10척이 격침되었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왜선 2척은 남겨 놓았다.
나머지 2척으로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어 왜선 13척 모두 격침되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은 최전방 돌격선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5]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위용을 떨치게 된다.
[1] 사천시 : 경상남도 서남부에 있는 도시이 1995년 5월 10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었다
[2] 이언량(李彦良, ? ~ 1598년) :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1592년 6월 16일(5월 7일)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해전에서 거북선 우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 이기남(李奇男) :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당포(唐浦)해전에 거북선 돌격장,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우귀선 돌격장은 박이량이었다
[4] 원균(元均, 1540년~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5] 한산도대첩 :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학익진 전술로 유명하다.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출전하여 사천·당포 해전에 이어 왜군과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1592년 7월 12일 조선수군은 앞서 승리로 이끌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총 51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다음날 조선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진격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출처 : 힌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 당항포 :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1592년 7월 12일 조선수군은 앞서 승리로 이끌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총 51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다음날 조선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진격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출처 : 힌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 당항포 :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시 진주성에서 진주[2]목사 [1]김시민과 의병, 백성이 힘을 합쳐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진주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연승을 거듭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7월 이후로 해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면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의병들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에는 넓고 깊은 [4]해자가 있었다.
11월 7일, 3만의 왜군본대가 도착하면서 진주성을 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내는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성외로는 홍의장군 [3]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고 피리를 불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윽고 11월 9일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여 조선군은 [5]승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을 성위에서 쏟아부으면서 항전하였다. 또한 의병 2천여 명은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3]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왜군은 공격 6일째 되는날 총공세에 들어갔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1]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계속되는 공방전끝에 조선군은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부상당한 김시민은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으며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1]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 못했으나 계속되는 북진으로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휴전기로 접어들었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통하여 남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보복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는 데, 이를 2차 진주성 전투라 한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며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중요한 승리였다.
[1] 김시민(1554년~1592년) : 조선중기 무신, 임진왜란 때의 진주목사
[2] 목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부, 목, 군, 현의 체제)직으로 정3품에 해당하며 경상도에는 상주, 진주, 성주가 목체제였다.
[3] 곽재우(1552년~1617년)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뜻의 '천강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4]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5] 승자총통 : 조선 선조 8년부터 선조 11년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기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연승을 거듭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7월 이후로 해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면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의병들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에는 넓고 깊은 [4]해자가 있었다.
11월 7일, 3만의 왜군본대가 도착하면서 진주성을 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내는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성외로는 홍의장군 [3]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고 피리를 불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윽고 11월 9일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여 조선군은 [5]승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을 성위에서 쏟아부으면서 항전하였다. 또한 의병 2천여 명은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3]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왜군은 공격 6일째 되는날 총공세에 들어갔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1]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계속되는 공방전끝에 조선군은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부상당한 김시민은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으며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1]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 못했으나 계속되는 북진으로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휴전기로 접어들었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통하여 남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보복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는 데, 이를 2차 진주성 전투라 한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며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중요한 승리였다.
[1] 김시민(1554년~1592년) : 조선중기 무신, 임진왜란 때의 진주목사
[2] 목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부, 목, 군, 현의 체제)직으로 정3품에 해당하며 경상도에는 상주, 진주, 성주가 목체제였다.
[3] 곽재우(1552년~1617년)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뜻의 '천강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4]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5] 승자총통 : 조선 선조 8년부터 선조 11년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기
[1]벽제관 전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전투이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4]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총 병력은 5만에 이르렀으며, 전력을 정비한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 일본군은 북상중에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고 선봉부대를 보내 [2]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월 26일 명군 선봉부대는 [2]여석령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으로 명군은 패배하였다. 이여송은 전공의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1]벽제관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명군은 맹렬하게 싸웠으나 [7]고바야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되었고, [4]이여송은 심복인 [5]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부총병 [6]양원이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은 [3]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이 패배로 인해 명나라군의 한성 탈환 시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인 권율장군 휘하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벽제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그 뒤 명나라군의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한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벽제관(碧蹄館) :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전 날 머물던 역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2] 여석령(礪石嶺) :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3] 혜음령(惠蔭嶺) :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
[4] 이여송(李如松, 1549년~1598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 요동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라고 전한다
[5] 이유승(李有昇, 생년 미상~1593년) : 명나라 말기의 장수. 이여송의 심복 부장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을 보호하였으나 일본군이 쏜 조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6] 양원(楊元, 생년 미상~1598년) : 명나라의 무장.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직위는 명군 부총병이었다
[7]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년~1597년) :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이며 다이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4]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총 병력은 5만에 이르렀으며, 전력을 정비한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 일본군은 북상중에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고 선봉부대를 보내 [2]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월 26일 명군 선봉부대는 [2]여석령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으로 명군은 패배하였다. 이여송은 전공의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1]벽제관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명군은 맹렬하게 싸웠으나 [7]고바야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되었고, [4]이여송은 심복인 [5]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부총병 [6]양원이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은 [3]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이 패배로 인해 명나라군의 한성 탈환 시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인 권율장군 휘하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벽제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그 뒤 명나라군의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한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벽제관(碧蹄館) :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전 날 머물던 역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2] 여석령(礪石嶺) :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3] 혜음령(惠蔭嶺) :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
[4] 이여송(李如松, 1549년~1598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 요동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라고 전한다
[5] 이유승(李有昇, 생년 미상~1593년) : 명나라 말기의 장수. 이여송의 심복 부장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을 보호하였으나 일본군이 쏜 조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6] 양원(楊元, 생년 미상~1598년) : 명나라의 무장.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직위는 명군 부총병이었다
[7]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년~1597년) :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이며 다이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권율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며 하루동안 벌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하자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남진하여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진하던 명나라군과 전력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가 패함에 따라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이었던 권율 휘하의 3천여명의 조선군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흐름을 타고 보름 만에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 1군은 궤멸당했고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 3군은 조선의 포 사격으로 파괴되었다.
4군도 대패한 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공격하려 했으나 되려 조선군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어 6군도 승병들의 전술로 패퇴되었고, 마지막 7군이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인해전술로 몰아붙였고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화살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질 때 한강변으로 조선지원군과 화살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저녁 5시~7시 경이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행주산성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으로 현재 극히 일부 성벽만 보전되어 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권율(1537년~1599년) :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장수
* 화차(火車) :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
* 신기전(神機箭) : 조선 1448년(세종 30년) 제작되어 17세기 이후까지 널리 생산된 고체 로켓으로 화약 추진식 화살 무기
*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하였다
* 목사 : 지방행정구역인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 높은 등급의 직책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하자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남진하여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진하던 명나라군과 전력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가 패함에 따라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이었던 권율 휘하의 3천여명의 조선군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흐름을 타고 보름 만에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 1군은 궤멸당했고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 3군은 조선의 포 사격으로 파괴되었다.
4군도 대패한 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공격하려 했으나 되려 조선군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어 6군도 승병들의 전술로 패퇴되었고, 마지막 7군이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인해전술로 몰아붙였고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화살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질 때 한강변으로 조선지원군과 화살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저녁 5시~7시 경이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행주산성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으로 현재 극히 일부 성벽만 보전되어 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권율(1537년~1599년) :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장수
* 화차(火車) :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
* 신기전(神機箭) : 조선 1448년(세종 30년) 제작되어 17세기 이후까지 널리 생산된 고체 로켓으로 화약 추진식 화살 무기
*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하였다
* 목사 : 지방행정구역인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 높은 등급의 직책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 어영담에게 군사 31인을 주어 왜선을 치게 하여 당항포 근해의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의 주도치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한산도(閑山島)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 견내량(見乃梁)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 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
* 조방장(助防將) :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주로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무술을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는다
* 어영담(1532년~1594년) : 조선 경상도 사천현감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이순신 장군 휘하의 장수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 어영담에게 군사 31인을 주어 왜선을 치게 하여 당항포 근해의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의 주도치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한산도(閑山島)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 견내량(見乃梁)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 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
* 조방장(助防將) :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주로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무술을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는다
* 어영담(1532년~1594년) : 조선 경상도 사천현감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이순신 장군 휘하의 장수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정유재란 시기인 1597년(선조 30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과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원균 등이 도주 중 전사한다.
조선 조정은 7월 21일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이다.
* 칠천량(漆川梁) 해협 :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인 칠천도(七川島)사이의 해협
조선 조정은 7월 21일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이다.
* 칠천량(漆川梁) 해협 :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인 칠천도(七川島)사이의 해협
임진왜란 중에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이 대규모 침입을 재차 시도해 1597년(선조 30)에 대규모의 전투 병력이 경상도 해안지대에 집결하여 해상과 육상에서 전면적인 총공세를 취했다.
1598년(선조 31) 8월에 풍신수길(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 노량(露梁)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1598년(선조 31) 8월에 풍신수길(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 노량(露梁)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