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987년 11월 29일, 조회수 : 401, 등록일 : 2020-05-23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한반도와 국제 사회를 뒤흔든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항공기 테러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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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던 중 1987년 1월 13일 자신의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에서 서울 [2]남영동 대공분실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당시 경찰은 그가 도피 중이던 민주화운동가 [1]박종운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여 조사를 벌였으며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그는 고문 도중 1월 14일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질식사하였다. 이는 명백한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경찰은 14일 밤에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으나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지휘아래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다.
사건 직후 경찰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 하고 쓰러졌다"라는 거짓 발표를 하여 단순 사고사로 은폐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가 외부로 유출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정권의 태도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사건은 [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계와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진상 규명 운동을 촉발하였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같은 해 6월 민주항쟁으로 확산되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으며 그 결과 당시 [3]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고문과 그 은폐 시도가 국민의 저항과 정의를 향한 열망 앞에서 무력화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1] 박종운(1961년 12월 22일~) : 박종철의 선배.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 [2] 남영동 대공분실 : 치안본부 대공수다단 분실로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에 위치.2021년부터 리모델링 및 신규 건축 공사를 거쳐 2025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3]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임기, 1980년 9월 1일~1988년 2월 24일). 12.12사태 주범 [4]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 1974년에 결성된 한국 천주교의 사회참여 단체로,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최초로 폭로하며 민주화 운동의 전환점을 만든 주체 중 하나였다. 이후에도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6월 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