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대한민국 사건기간 : 1987년 11월 29일, 조회수 : 401,   등록일 : 2020-05-23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한반도와 국제 사회를 뒤흔든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항공기 테러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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