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
이란
이라크
사건기간 : 1980년 9월 22일~1988년 8월 20일, 조회수 : 1365, 등록일 : 2020-05-13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이후 신군부)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권유린, 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하여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5.17내란'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대학생들의 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문화축제이다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 194개 대학의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측 통산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주관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문도(1940년~2016년) : 조선일보 출신의 정치인. 12·12 군사 반란의 주역들과 함께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 194개 대학의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측 통산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주관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문도(1940년~2016년) : 조선일보 출신의 정치인. 12·12 군사 반란의 주역들과 함께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영국령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이다.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는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 남미대륙 남단 혹은 아르헨티나 남대서양 마젤란 해협에서 480km떨어져 있고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수상은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Malvinas) 전쟁이라고 부른다.
*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2003년)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1925년~2013년) :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는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 남미대륙 남단 혹은 아르헨티나 남대서양 마젤란 해협에서 480km떨어져 있고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수상은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Malvinas) 전쟁이라고 부른다.
*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2003년)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1925년~2013년) :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1983년 9월 1일 오전 12시 05분(미국 뉴욕시간) 뉴욕 JFK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급유를 위하여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 여객기가 당시 소련의 영공인 [1]사할린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인근바다에 추락하여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묘소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힌두교와 무슬림교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어 1947년에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였다. 이 와중에 [1]시크교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인도 국민회의당은 경제계획 실패, 언론탄압등으로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디. 이 시점에 일부 시크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인 [3]칼리스탄 건설을 요구하면서 [2]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 정부를 테러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에 국민회의당 정부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테러의 본거지인 [4]펀자브주의 [5]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서 시위를 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후 [2]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경호원인 두 명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인도 수도 델리 전역에서 사흘간 국민회의당 소속 정치인이 조직적으로 사주한 군중에 의해 시크교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피살되었고, 6만여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델리의 13개 시크 사원이 불에 타 버렸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분단이후 델리로 이주해 온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로서 델리가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 이후 많은 시크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립국 칼리스탄 건국을 지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참조]
- 세계의 도시와 건축 - 델리, 역사성과 신민성이 만나는 곳, 류연택, 이광수외 12,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 시크교(Sikhism) :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창시된 종교.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왔다
[2]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년~1984년) : 인도의 제3대총리로 두 차례에 걸쳐 역임(1966년 1월 19일~1977년 3월 24일, 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첫 여성 총리. 인도 독립후 초대 종리를 지낸 자와할란 네루의 딸
[3] 칼리스탄(Khalistan) :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이 건설할 독립국가를 부르는 명칭. 현재에도 급진파들 사이에서 분리 독립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펀자브(Punjab) :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파키스탄 국경과 접해있다
[5] 암리차르(Amritsar) :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이 유명하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인도 국민회의당은 경제계획 실패, 언론탄압등으로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디. 이 시점에 일부 시크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인 [3]칼리스탄 건설을 요구하면서 [2]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 정부를 테러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에 국민회의당 정부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테러의 본거지인 [4]펀자브주의 [5]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서 시위를 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후 [2]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경호원인 두 명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인도 수도 델리 전역에서 사흘간 국민회의당 소속 정치인이 조직적으로 사주한 군중에 의해 시크교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피살되었고, 6만여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델리의 13개 시크 사원이 불에 타 버렸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분단이후 델리로 이주해 온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로서 델리가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 이후 많은 시크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립국 칼리스탄 건국을 지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참조]
- 세계의 도시와 건축 - 델리, 역사성과 신민성이 만나는 곳, 류연택, 이광수외 12,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 시크교(Sikhism) :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창시된 종교.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왔다
[2]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년~1984년) : 인도의 제3대총리로 두 차례에 걸쳐 역임(1966년 1월 19일~1977년 3월 24일, 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첫 여성 총리. 인도 독립후 초대 종리를 지낸 자와할란 네루의 딸
[3] 칼리스탄(Khalistan) :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이 건설할 독립국가를 부르는 명칭. 현재에도 급진파들 사이에서 분리 독립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펀자브(Punjab) :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파키스탄 국경과 접해있다
[5] 암리차르(Amritsar) :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이 유명하다
러시아 모스크바 기준 시간으로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에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SSR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엄청난 방사능이 유출된 사고이다.
이 폭발은 2차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우크라니아 SSR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국인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직후 당시 실무책임자의 거짓보고와 후에 폭발사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거짓말과 은폐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하여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소련의 붕괴 및 해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SSR(Soviet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SFSR(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체르노빌(Chernobyl) :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로서 키예프주에 속하며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르노는 '검은' 빌은 '잎사귀'로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폭발은 2차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우크라니아 SSR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국인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직후 당시 실무책임자의 거짓보고와 후에 폭발사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거짓말과 은폐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하여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소련의 붕괴 및 해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SSR(Soviet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SFSR(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체르노빌(Chernobyl) :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로서 키예프주에 속하며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르노는 '검은' 빌은 '잎사귀'로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우발적 사건이라 발표하면서 축소조작하였으나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은 이러한 왜곡 사실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해명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우발적 사건이라 발표하면서 축소조작하였으나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은 이러한 왜곡 사실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해명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한반도와 국제 사회를 뒤흔든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항공기 테러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전쟁은 두나라간의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독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으로서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나 이후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한 분쟁이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하계 올림픽(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