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대한민국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17일, 조회수 : 397,   등록일 : 2020-05-01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2차례의 아편전쟁 패배와 자국내 태평천국의 난으로 극심한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재기를 위하여 [3]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서구화 및 사회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5]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근대화를 이루었고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1]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게 된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타국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되어 조선은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한반도내의 영향력을 지배하기 위하여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계속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청나라의 조선개입을 막으려 했다.

7월 25일 일본은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면서 청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였다(풍도해전). 이는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아산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고 패한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성환전투).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선전포고하고 청일전쟁은 한반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연승한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였고 청나라가 자랑하는 [4]북양함대는 일분군에게 궤멸당했다(황해해전).
 
청나라는 연패하자 당시 실권자인 [2]공친왕 혁흔은 화친쪽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으로 2억 3천냥을 일본에 지불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랴우둥반도, 타이완섬, [6]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추후 랴우둥 반도는 3국 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하에 보급품은 조선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군수물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하면서 조선 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청일전쟁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본은 대만과 중국 영토일부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운명이 되었다.
   
[1] 동학농민운동 : 탐관오리의 부조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2]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3]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4] 북양함대 :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현대화된 해군으로 1871년 북양대신 이홍장의 지원으로 창설되었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였다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Copyright 2020 TMS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