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907년 7월 24일, 조회수 : 398, 등록일 : 2020-04-30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의 [1]고종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에 순종을 즉위시켰다. 4일 후인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조약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이완용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조인에 찬성한 내각 7인을 [2]정미칠적이라 한다.
군대 해산을 비롯하여 대한제국의 행정 및 법적 분야에서 자율적 권한을 박탈한 강제 협약으로 7개 조문으로 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한국 군대의 해산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할 것.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을 폐지할 것.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정미칠적
- 이완용(1858년~1926년) : 내각총리대신,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1857년~1925년) : 농상공부대신,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1864년~1926년) : 군부대신, 자작
- 고영희(1849년~1916년) : 탁지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1860년~1919년) : 법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1859년~1943년) : 학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1860년~1919년) : 내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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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에 해당하는 남서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토착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강제 노동, 토지 몰수, 경제적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헤이그 특사사건은 대한제국 [3]고종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1]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고 대한제국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이었다.
[3]고종은 [5]이준, [6]이상설, [7]이위종과 7개 언어를 구사하는 미국인 [8]호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일행은 만국평화 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활동을 벌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하고 말았다.
특사일행은 각국의 비공식 경로를 통하여 서방열강국들에게 한국의 입장과 협조를 호소하였으나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제사회의 냉담한 반응으로 원하던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통탄한 이준열사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7월 14일 헤이그 호텔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사망했으니 열사의 순국이라 불리는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에 [4]순종을 즉위시키고 4일 후인 7월 24일 [2]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하였다. 31일에는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대한제국은 무력화되었다.
[1] 만국평화회의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
[2]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 일본이 1907년 대한 제국의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7월 24일 체결한 조약. 7개 조문으로 되어있어 '정미 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3]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국왕(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4] 순종(1874~1926) :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1907년~1910년). 조선의 마지막 군주
[5] 이준(1859년~1907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초대검사, 법률가, 외교관. 전 평리원 검사
[6] 이상설(1870년~1917년) : 대한제국의 문신. 전 의정부 참찬
[7] 이위종(1884년 ~ ?) : 대한제국의 외교관. 전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8]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년~1949년) : 미국의 선교사.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