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905년 11월 17일, 조회수 : 601, 등록일 : 2020-04-30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을사늑약(乙巳條約)이라고도 불린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일본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조약체결에 나선다. 일본은 조약체결을 위하여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과 회유했으나 찬성하는 이 한명없이 체결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대신들에게 찬반을 묻는 회의를 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이 계속되자 처음으로 이완용이 찬의를 표하자 이지용과 이근택이 동조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내용]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사조약), 위키백과, 나무위키]
* 태프트·가쓰라밀약(Taft–Katsura agreement, 1905년 7월 29) :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상호 인정하였다
*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 : 영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재배권을 인정하였다
* 포츠머스 조약( Treaty of Portsmouth, 1905년 9월 5일) :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였다
*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 중의 하나이며 일본 제국의 제1, 5, 7, 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대한제국 통감
* 을사오적
- 이완용(1858년~1926년) : 학부대신 : 후작
- 이근택(1865년~1919년) : 군부대신 : 자작
- 이지용(1870년~1928년) : 내부대신 : 백작
- 박제순(1858년~1916년) : 외부대신 : 자작
- 권중현(1854년~1934년) : 농상공부대신 : 자작
* 민영기(1858년~1927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조약 당시 마지막까지 반대 했으나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로 취임하며 친일로 돌아섰다. 남작
* 이하영(1858년~1929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조약 당시 표면상으로 반대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자작
* 이재극(1964년~1927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궁내부대신. 남작. 고종을 협박하는 일을 맡았고 왕실의 종친 중 대표적인 친일파
* 한규설(1848년(~1930년) : 참정대신에서 해임. 1910년 경술국치이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에 해당하는 남서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토착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강제 노동, 토지 몰수, 경제적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청나라로 부터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 받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측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야심에 대하여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 및 득일)으로 일본은 청나라에 [2]랴오둥반도를 반환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1896년 러시아는 러청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반도의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만주 복부를 관통하여 볼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3]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득일이 [4]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영국이 [5]구룡반도와 [6]웨이하이웨이를,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7년 12월 12일 청으로부터 [2]뤼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뤼순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1].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일본의 증원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정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기간중 일본은 1902년 2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8]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정지출이 너무 커서 결국 미국의 중재하에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7]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2]랴오둥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남하정책이 좌절되었으며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여 러시아 혁명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 쓰시마 해전 승패에 대한 분석, 김태준,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4.04.03 [2]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요동 반도) :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 뤼순(여순), 다롄(대련)이 위치하고 있다 [3] 동청철도(東淸鐵道) : 중국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으로 러시아의 치타()와 남동으로 블라디보스크로 연결된 철도 노선 [4] 자오저우만(膠州灣, 교주만) :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만 [5] 구룡반도(九龍半島) : 홍콩 특별행정구에 속하는 중국 남부에 위치하는 반도 [6]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산둥반도의 동쪽에 있다 [7]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임기는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8] 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제국은 [5]크림전쟁에서 처참한 패전 이후 뒤처진 현실을 파악하고 내정개혁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면서 1861년에 농노제 폐지등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농노제는 유상으로 폐지되어 농민들은 지주귀족에게 보상금을 반환해야 했으며 부르조아에게 농토를 구매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자영농집단은 형성되지 않았다. 또한 농업의 낙후성은 러시아 농업구조의 변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결국 다수의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 노동자 집단이 급속히 증대하고 좌파세력이 증진하는 가운데에도 [1]차르정부가 고수한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는 사회갈등만 심화시켰다.
차르정부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무시키면서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의 강행과 연속적인 패배속에 민중의 불만은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가 [6]러일전쟁에서 참패한 1905년 1월, [2]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중노동과 열악한 임금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3]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대는 황제의 초상화를 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시위대의 최선두에서 이끌었던 것은 [4]게오르기 가폰 신부였다. [4]가폰 신부는 국가 비밀경찰의 공작원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분노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듯하자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만들었다.
농민 출신이 대다수였던 병사들도 엄청난 병력 손실과 통지의 황폐, 가족들이 겪는 생활난에 공감하여 시위 대중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평화로운 시위에 황제 수비대는 시위 대열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어 대포도 여러발 발사하여 1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룩한 주일이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무자비한 학살은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시위, 그리고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3]니콜라이 2세(Nikolai II)황제는 대중의 도전 앞에 자유주의적 입헌개혁을 요지로 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약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자,농민들은 자체 대표기관을 형성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필두로 각 지역에 조직되기 시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러시아의 무리한 참전은 경제구조를 피폐시켰고 민중의 생활난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7]로마노프 왕조의 차르정부는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다.
[출처]
-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박구병외 8, 2021, P253~255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차르(Tsar) : 동방 정교회를 믿는 남슬라브족 및 동슬라브족 문화권의 군주 칭호. 차르 군주의 대표적인 나라는 러시아
[2]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이는 제2의 도시. 발트해의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 하구에 있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러시아 황제가 거주했던 겨울궁전으로 유명하다
[3]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of Russia, 1868년~1918년) : 러시아 제국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1894년 11월 1일~1917년 3월 15일). 러시아 혁명(1917년 2월 혁명)후 본인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가 총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4] 게오르기 가폰(Georgy Gapon, 1870년~1906년) : 러시아 정교회 사제, 혁명가. 1906년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당했다
[5] 크림전쟁(Crimean War) :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 프랑스 제2제국, 대영제국과 사르데냐 왕국이 결성한 동맹군에 패배한 전쟁
[6] 러일전쟁 :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이 대한제국, 만주와 인근 해역에서 벌인 전쟁
[7] 로마노프 왕조(House of Romanov) :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5년간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쌍두독수리가 상징이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이어주는 곳에 위치하여 많은 유럽 국가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1904년 프랑스는 스페인과 상호조약을 체결해 모로코를 분할하기로 했으며, 모로코에서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받는 대가로 영국의 이집트 진출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프랑스의 세력확장을 염려하였던 독일의 [1]빌헬름 2세가 모로코 [3]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 개방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모로코 진출에 대한 부정적 영향력을 끼쳤다. 모로코의 [2]술탄은 프랑스의 진출을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전쟁의 위기상황까지 치달았으나 1906년 1~4월에 스페인 [4]알헤시라스에서 13개국이 참가한 국제회의로 위기를 벗어났다. 이 회의에서 프랑스는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의 확고한 지지와 특히 영향력이 가장 컸던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모로코 진출을 인정받게 되었다. 반면 독일을 지지하는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뿐이었다. 독일은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합의를 수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영불협상이 성공하는 데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이 발발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탕헤르 위기(Tangie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1]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년~1941년) :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국 국왕(재위 1888년~1918년). 독일의 마지막 군주. 근대 역사에서 '카이저(Kaiser) 황제'라고 지칭함(카이저 수염의 유래).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강제 퇴위.
[2] 술탄 : 이슬람국가의 군주를 부르는 말. 아랍어로 권위, 권력을 듯하며 왕족을 지칭하는 칭호
[3] 탕헤르(Tangier) :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 인근의 도시.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이어주는 국제적인 도시
[4] 알헤시라스(Algeciras) : 스페인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
쓰시마 해전은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섬 부근 바다에서 러시아의 [1]발틱함대와 일본의 [2]연합함대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당시 러시하 해군의 규모는 일본함대 규모의 3배에 해당할 정도록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발틱해의 발틱함대, 태평양의 태평양함대, 흑해의 흑해함대, 북극해의 북방함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발틱함대는 태평양 함대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청나라에서 조차한 라오둥 반도의 뤼순항이 건재하고 [1]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이동시켜 태평양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일본 연합함대를 격파하여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1904년 10월 14일 발틱함대는 발트해의 [4]리에파야항에서 출항하여 아프리카의 남쪽끝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통과하여 중국 연안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으로 향하는 8개월 동안 18,000마일의 항해틀 시작하였다.
[1]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기 위해 선택할 항로는 쓰시마 해협과 [5]스가루 해협의 두 항로였다. 사령관인 [3]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두 항로 중 최단 항로인 쓰시마 해협을 선택하였다.
일본 [2]연합함대의 사령관인 [6]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을 선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날 대한민국 경남 창원시 진해만에 전 함대를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면서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일본의 순양함 한척이 쓰시마 해협 접근로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발견하였다. 일본 전함대의 출동명령으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는 서로 대척하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인 [7]미카사의 전투개시신호를 알리며 양 함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측의 함포가 격렬하게 불을 뿜으면서 치열한 교전이 지속되었지만 일본 함대는 계속적인 우세를 유지하였다. 지휘부의 집중 공격으로 발틱함대의 기함이 침몰했으며 사령관 [3]로제스트벤스키는 중상을 입었으며, 러시아 진형은 분산되었다.
5월 27일 쓰시마 동쪽 해상에서 시작된 쓰시마 해전은 28일 울릉도 근해에서 발틱함대가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해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발틱함대가 궤멸됨으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해전이었다.
발틱함대의 38척의 군함과 기타함정들 중 34척은 침몰,자침,포획 또는 억류당하였다. 장교 및 사병을 포함하여 4,83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6천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일본 연합함대측에은 3척의 어뢰정이 침몰하였고 3척의 주력 함정이 경미한 손상을 받았으며 11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틱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의 승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본격화하고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극해의 북방함대, 흑해의 흑해함대, 태평양(동해)의 태평양함대, 카스피해의 카스피해 전단 등 4개의 함대와 1개의 전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연합함대(聯合艦隊) : 함대의 연합을 뜻하는 일반명사지만 이 시기의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유명하여 고유명사가 되었다 [3]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1848년~1909년) :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제독이며, 최종 계급은 중장.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4]리에파야 : 라트비아 서쪽의 발트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발트연안 지역이 독일의 영향으로 1920년까지는 독일어 명칭인 "리바우"가 널리 쓰였다. 러시아어 명칭인 "리예파야"라 표기되기도 한다 [5]쓰가루 해협 :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 있는 해협. 동해와 태평양을 잇는다 [6]도고 헤이하치로(1848년~1934년) : 일본의 해군제독.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 [7]미카사(三笠) : 일본이 1898년 영국에 주문한 전함으로 1904년부터 러일전쟁에서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의 미카사 공원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다. 15,000톤, 18노트
포템킨 사건은 러시아 제국 흑해 함대의 [1]전드레드노트급 전함 포템킨에서 발생한 수병들의 반란으로, 1905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제국 내 억압적인 체제와 군 내부의 열악한 환경, 부패한 지휘 체계에 대한 수병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1905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국내 불안이 증폭되었고,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은 점점 더 큰 불만을 품었고, 군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해군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급여나 처우를 받지 못했고, 지휘관들의 가혹한 통제와 폭력적인 처벌이 만연했다.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부실한 식사였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에게 제공된 식사 재료인 고기가 썩어 구더기가 발견되었고, 수병들은 썩은 고기로 만든 식사를 거부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지휘부는 이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항의한 수병들을 모아 처형하려는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지휘부의 강압적인 태도는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결국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시작되자 수병들은 지휘관과 주요 장교들을 처형하고 전함을 완전히 장악했다. 반란군은 흑해의 항구도시 [3]오데사로 이동하여 시민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당시 [3]오데사에서도 노동자와 혁명 세력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포템킨의 도착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오데사의 민중들은 반란을 지지하며 항구에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5]세바스토폴의 흑해함대는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전함 5척을 파견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항구는 혼란에 빠졌다. 포템킨의 수병들은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다른 항구로 이동하며 외교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러시아 해군의 전면적인 추격과 압박을 받았다.
결국 포템킨의 수병들은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지친 끝에 7월 8일 루마니아의 [4]콘스탄차 항구에 도착하여 항복을 선택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수병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전함을 러시아에 반환하였다. 일부 수병은 망명이 허용되었지만, 다수의 수병은 러시아로 송환되어 교수형, 유배형, 징역형등을 선고받았다.
포템킨 전함은 7월 10일 루마니아 [4]콘스탄차를 출발하여 7월 14일 [5] 세바스토폴로 귀항했다. 이후 포템킨은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력으로 복귀했으나, 노후화와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1923년부터 해체되어 1925년에 최종퇴역했다.
포템킨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러시아 혁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제국의 억압적인 체제와 군 내부의 부패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러시아 민중의 혁명 열망을 더욱 자극했다. 12년 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판을 마련한 사건으로도 회자된다.
이 사건은 이후 1925년 소련 영화감독 [6]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전함 포템킨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계단에서의 학살 장면은 시각적 충격과 혁명의 상징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전드레드노트급 전함(Pre-dreadnought battleship) : 20세기 초 등장 이전의 구식 전열함으로, 장거리 화력과 속도가 제한된 다양한 구경의 함포를 탑재한 전함 유형 [2] 흑해함대(Black Sea Fleet) : 러시아 제국 및 이후 소련과 러시아 해군의 주요 해상 전력으로, 흑해와 지중해 지역의 군사적·전략적 요충을 담당하는 함대 [3] 오데사(Odesa) :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흑해 최대 항구로, 역사적으로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주요 군사·무역 거점이자 1905년 포템킨 반란의 중심지였다 [4] 콘스탄차(Constanța) : 루마니아의 흑해 연안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략적·상업적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포템킨 반란 당시 선원들이 피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5] 세바스토폴(Sevastopol) : 크림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흑해의 주요 항구로 전략적 위치와 도시 항구의 항해 가능성으로 인해 역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항구 및 해군 기지였다 [6]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senstein, 1898년 1월 23일 ~ 1948년 2월 11일) : 소련의 영화감독, 영화 이론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1]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2]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기록이다.
1924년 '가쓰라-태프트 전보문서'의 존재가 알려진 후 미국과 일본사이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이는 국가 간의 공식 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당시의 회담이 공식적인 협약이었는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태프트가 이 사안을 보고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놓은 긍정적인 답변에서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프트와의 회담을 통해 한반도 지배권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미 미국과 일본은 루스벨트의 제안으로 1905년 1월 미일중재조약(美日仲裁條約)을 체결하였다. 중재조약(Arbitration Treaty)이란, 만약 중재조약을 체결한 국가 사이에 법적 성격을 띤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헤이그의 국제법정(Hague Arbitral Court)에서 해결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국가 간의 계약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중재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재판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미국과 일본 간의 공식 합의는 가쓰라-태프트 회담이 있기 7개월 전에 이미 있었던 셈이다.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는 다만 미일중재조약의 연장선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일본에 재확인시켜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년~1930년일) : 미국의 27번째 대통령(재임 1909~1913). 필리핀 초대 총독(재임 1901년~1904년)
[2] 가쓰라 다로(1848년~1913년) : 11대(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13대(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15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내각총리대신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한 강화 조약이다
1904년 2월에 시작된 러일 전쟁이 1년여 간 지속되자 양국 모두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로 1905년 8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 배상금과 사할린 양여 문제, 만주와 중국 청나라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권한에 관한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조약의 주선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러일전쟁 종식).
조약은 1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시아는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러시아의 관동주(뤼순, 다롄)조차지와 창춘(장춘)-뤼순(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제3조~8조)
3.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및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4.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제11조와 제12조)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 해 11월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굴욕을 당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위키백과, 나무위키]
*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 26대 대통령. 임기 : 1901년~1909년
* 포츠머스(Portsmouth) : 미국 뉴우햄프셔(New Hampshire)주에 있는 군항 도시
* 관동주 조차지 : 중국 랴오둥 반도 남쪽의 조차지(뤼순, 다롄)로 189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905년 8월 12일 영국과 일본은은 1차 협약을 개정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보호권을 보장받았으며 일본은 만주에서 철수할 러시아가 인도로 진출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의 적용 범위를 종래의 '극동'에서 '동아시아 및 인도'로 확대하였다. 또한,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하였다.
1905년 9월 [1]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의 조선 지배가 공식 승인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1]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 :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맺은 강화 조약 [2]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