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幸州大捷)

대한민국 일본 사건기간 : 1593년 3월 14일, 조회수 : 492,   등록일 : 2020-04-23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권율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며 하루동안 벌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하자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남진하여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진하던 명나라군과 전력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가 패함에 따라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이었던 권율 휘하의 3천여명의 조선군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흐름을 타고 보름 만에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 1군은 궤멸당했고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 3군은 조선의 포 사격으로 파괴되었다.
4군도 대패한 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공격하려 했으나 되려 조선군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어 6군도 승병들의 전술로 패퇴되었고, 마지막 7군이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인해전술로 몰아붙였고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화살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질 때 한강변으로 조선지원군과 화살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저녁 5시~7시 경이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행주산성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으로 현재 극히 일부 성벽만 보전되어 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권율(1537년~1599년) :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장수
* 화차(火車) :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
* 신기전(神機箭) : 조선 1448년(세종 30년) 제작되어 17세기 이후까지 널리 생산된 고체 로켓으로 화약 추진식 화살 무기
*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하였다
* 목사 : 지방행정구역인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 높은 등급의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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