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사건기간 : 1942년 4월 18일, 조회수 : 47, 등록일 : 2025-02-17
둘리틀 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한 최초의 공습 작전으로, 1942년 4월 18일에 수행되었다. 이 작전은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B-25 미첼 폭격기 16대가 항공모함 [1]USS 호넷(Hornet)에서 발진하여 일본을 공격한 전례 없는 작전이었다. 이 공습은 [3]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둘리틀 공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먼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 태평양 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에 대한 보복의 필요성이 커졌다. 또한, 일본은 태평양에서 연전연승하며 본토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미국은 공습을 통해 일본 국민과 정부에 심리적 충격을 주고 사기를 저하시킬 계획이었다. 아울러, 미국 내에서는 진주만 공습 이후 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으며,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함으로써 미국 국민과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 작전은 군사적 피해보다 심리적·전략적 효과가 중요한 의미를 가졌으며, 일본군이 본토 방어에 집중하도록 유도하여 태평양 전쟁의 전개 방향을 바꾸려는 의도도 있었다.
1942년 4월 2일, USS 호넷은 16대의 [2]B-25 미첼 폭격기를 실은 채 태평양을 향해 출항했다. USS 엔터프라이즈가 호위를 맡았으며, 두 항공모함은 일본 본토에서 약 1,370km 떨어진 지점에서 폭격기들을 발진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4월 18일 아침, 일본 초계선이 미군 함대를 발견하면서 계획이 변경되었다. 일본군이 미군을 발견하자, 둘리틀 중령은 작전을 즉시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폭격기들은 원래보다 약 400km 더 먼 거리인 1,200km 떨어진 곳에서 출격해야 했다.
16대의 [2]B-25 폭격기는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고베 등 일본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 폭격 목표는 군사 기지, 공장, 항구, 연료 저장 시설 등이었으며, 직접적인 군사적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 본토가 공격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 국민과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폭격을 마친 후, 폭격기들은 연료 부족으로 인해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해야 했으나 대부분이 불시착하거나 추락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으며, 한 대는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불시착해 승무원들이 소련에 억류되었다. 다행히 둘리틀 중령을 포함한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중국 저항군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둘리틀 공습은 일본에 심리적 충격을 주었으며, 본토 방어에 대한 우려를 높였다. 일본군은 이후 본토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을 수정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항공모함을 완전히 격멸하고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의 큰 패배로 이어지며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둘리틀 공습이 큰 승리로 여겨졌으며, 국민과 군대의 사기가 크게 상승했다. 제임스 둘리틀 중령은 공습 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준장으로 즉시 승진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군을 도운 대가로 일본군의 보복을 받게 되었으며, 일본군은 저장성과 장시성 일대에서 대규모 학살과 보복 공격을 감행하여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를 화남 대학살이라 한다.
둘리틀 공습은 군사적 피해보다 심리적·전략적 효과가 컸던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본토가 공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방어 전략을 수정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전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반격을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미국과 일본의 전쟁 양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USS : United States Ship [2] B-25 미첼(B-25 Mitchell) :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운용한 중형 폭격기로, 기동성이 뛰어나고 다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둘리틀 공습에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사용된 항공기로 유명하다. [3]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James Harold Doolittle, 1896년 12월 14일 ~ 1993년 9월 27일) : 1942년 둘리틀 공습 지휘로 유명한 미국의 군인으로 보통 "지미"라고 불렸다. 중장으로 전역했으나 예비역 진급심사에 통과해 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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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이루어진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간에 벌어진 전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한 제약을 받았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등장했다. 독일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 내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이탈리아와 일본도 각각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으며, 1941년에는 소련을 침공하며 전선을 더욱 확대했다. 같은 해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전세는 1942~1943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며 동부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부 전선을 개방했고, 독일군은 연합군과 소련군의 압박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끝났다.
한편,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공식적인 종전은 9월 2일에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UN)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 다른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독일과 소련이 중앙 유럽의 분할지배에 합의하고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없이 [1]바르바로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소련을 침공하였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2]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달한다. 이렇듯이 개전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이 전쟁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나치 독일과 소련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1]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명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2] 힘키(Khimki) : 러시아 모스크바주에 있는 도시로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이 해당된다.
1942년 2월 19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해군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1]다윈 지역을 대규모로 공습했다. 이는 일본군이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를 직접 공격한 가장 큰 공습이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중요한 전략적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공습은 일본 해군 항공대가 주도했으며, 이들은 진주만 공격을 수행했던 동일한 부대와 일부 항공기를 사용했다. 총 두 차례의 공습이 이루어졌으며, 첫 번째 공격은 오전 9시 58분경, 두 번째 공격은 정오 무렵에 발생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폭격기와 전투기를 동원해 다윈 항구, 군사 기지, 비행장, 병참 시설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 공습으로 인해 약 25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군함과 상선이 격침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다윈 도시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군과 민간 시설이 대거 파괴되었다. 이 공습은 1942부터 1943년까지 약 100회여 차례 걸친 다윈을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지역에 대한 공습의 시작점이었으며, 단일 공격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이 사건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에게 전쟁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는 본토 방어를 강화하고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윈 공습은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가장 심각한 본토 공격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1] 다윈(Darwin) :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의 주도이자 호주 본토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항구
일본군은 1941년 진주만 공습을 통해 미국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항공모함들이 대부분 살아남아 일본의 태평양 지배에 위협이 되었다. 특히, [1]USS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USS 호넷(Hornet), USS 요크타운(Yorktown) 등의 항공모함 전력이 건재했으며, 이는 일본의 해상 작전 수행에 큰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 미국 항공모함을 궤멸시키고,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미드웨이는 하와이에서 약 2,100km 서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미국이 태평양 방어를 위한 주요 거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를 점령하면 하와이에 대한 위협을 증가시키고, 미국의 태평양 작전 수행을 방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전쟁 준비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미국 산업력과 전력 증강이 본격화되기 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 미국이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포기하거나 협상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1942년 4월 18일, 미국은 [2]둘리틀 공습으로 일본 본토인 도쿄, 요코하마 등을 폭격했다. 비록 군사적 피해는 적었지만, 일본 내에서 본토를 공격받은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군은 태평양 방어선을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일본군은 [3]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4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과 전함, 순양함, 구축함 등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미국의 암호 해독팀이 일본의 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4]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일본군의 작전 시기를 예상하고 미드웨이 인근에서 기습을 준비했다.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크타운 항공모함과 미드웨이 기지의 항공대를 동원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6월 4일 오전 일본군이 미드웨이 섬을 폭격했으나, 미군 방공망이 예상보다 강력해 피해가 제한적이었다. 일본 항공모함이 공습 후 재정비 중이던 틈을 이용하여 미군 [5]SBD 돈틀리스폭격기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아카기, 카가, 소류가 폭격을 맞아 연달아 침몰하였다.
유일하게 남은 일본 항공모함 히류가 반격하여 미군 항공모함 요크타운을 공격해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나 오후에 미군의 추가 공격으로 히류마저 격침되었다. 일본군은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퇴각하였다.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잃었고, 숙련된 조종사 및 승무원 약 3,000명 사망하였다. 반면 미국은 항공모함 요크타운 1척을 잃었지만, 피해는 일본보다 훨씬 적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이 태평양에서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이 실패한 전투였다. 일본군의 암호가 해독된 점과 미국의 효과적인 방어 전략이 승패를 가른 중요한 요소였다. 이 전투 이후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은 점점 미국과 연합군으로 넘어갔으며, 전쟁의 흐름을 바꾼 가장 중요한 해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1] USS : United States Ship [2]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 :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1942년 4월 18일에 미군이 일본 본토를 폭격한 첫 번째 공습으로, 일본에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미드웨이 해전의 원인 중 하나이다 [3] 야마모토 이소로쿠(1884년 4월 4일~1943년 4월 18일)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4]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Chester William Nimitz, 1885년 2월 24일 ~ 1966년 2월 20일) :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태평양 지역의 미국과 연합국의 부대를 지휘한 총사령관 [5] SBD 돈틀리스(Dauntless) : SBD는 Scout Bomber Douglas의 약자로 미국 더글러스 항공사에서 제작한 정찰 및 급강하 폭격기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과달카날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전투로, 주로 미군을 중심으로 호주, 뉴질랜드등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서 벌인 격전이다. 이 전투는 미국의 첫 본격적인 반격 작전이자 일본의 확장 전략이 좌절된 결정적 전투로,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이 일본에서 연합군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진주만 공격을 통해 태평양 전역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확장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남태평양 [1]솔로몬 제도의 섬 중에 하나인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의 확장 전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섬이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과달카날은 원래 조용하고 평화로운 섬이었다. 하지만 1942년 여름, 일본군이 [2]헨더슨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섬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 비행장은 호주와 미국의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만약 일본이 과달카날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태평양 남부의 주도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1942년 8월 7일,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 섬에 전격적으로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첫날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고, 미군은 [2]헨더슨 비행장을 손쉽게 점령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군은 결코 과달카날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밤이면 정글 속에서 일본군의 발소리와 함성이 들려왔고,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한 일본군의 끊임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미 해병대는 매일 밤 헨더슨 비행장을 방어하며 필사의 저항을 이어갔다.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섬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을 버티게 했다. 전투는 정글과 해안선에서 치열하게 벌어졌고, 과달카날은 피와 땀으로 물들어갔다.
바다 위에서도 전쟁은 계속됐다. 솔로몬 해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 같은 대규모 해상 전투가 과달카날 주변에서 벌어졌다. 일본 해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미 해군은 점차 제해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보급로가 차단되어 점점 고립되었고, 병력과 자원이 고갈되며 전투는 더욱 불리해졌다.
1943년 2월,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 철수는 단순한 패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후 미군은 [3]섬 뛰어넘기 전략을 통해 일본의 본토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전투로 기억된다. 미 해병대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투로 남은 이 전투는 용기와 희생, 끈기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곳에서 싸웠던 병사들의 이야기와 헌신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과달카날은 오늘날에도 그들의 용기와 희생의 기억을 간직한 땅으로 남아 있다.
[1] 솔로몬 제도(Solomon Islands): 남태평양 지역에 위치한 군도 국가로 1978년 7월 7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현재는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회원국으로,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열대우림과 해양 생태계로 유명하다. 수도는 호니아라(Honiara) [2] 헨더슨 비행장(Henderson Field) : 과달카날 섬에 위치한 전략적 군사 비행장으로, 태평양 전쟁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과 일본군 간 격전의 중심지였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폭격기 편대를 이끌며 일본 항공모함에 공격을 시도하다 전사한 미 해병대 소속 로프턴 R. 헨더슨(Major Lofton R. Henderso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과달카날 상륙 후 미군이 일본군이 건설 중이던 비행장을 점령하고,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헨더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 섬 뛰어넘기(Island Hopping) : 태평양 전쟁 중 미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섬을 우회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만 점령하며 일본 본토로 진격한 전술
소련의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지역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군, 추축국간의 전투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전투중 하나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민간인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약2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전쟁 수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상자 수를 한 전투에서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투는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시가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치열한 시가전으로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독일군은 3개월 동안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전진끝에 11월에 폐허로 변한 시의 90%이상을 장악하였다. 이에 따른 소련군 및 민간인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소련은 독일군을 시내에 붙잡아 두고 양 측면을 공격하여 포위하는 작선을 세운다. 일명 "천왕성 작전"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을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포위망에 둘러싸인 독일군 및 추축국은 보급로가 원할하지 않게 되어 식량, 난방, 의약품 부족 및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고 동상과 영양실조등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소련군의 맹공으로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기아에 허덕이던 독일군은 결사적 항전을 계속했다. 포위망을 좁혀오자 결국 독일군 및 추축국은 항복한다.
이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섬멸당한 전투로써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일과 소련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이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전투력은 대폭 향상되어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 스탈린그라드 : 현재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 추축군 : 독일군(6군), 루마니아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 크로아티아 의용군
[1]산타크루즈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중 과달카날 전역의 일환으로 발생한 항공모함 전투이다. 1942년 8월 미군이 과달카날을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에서의 지상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미 해군의 항공 지원을 차단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연합군의 해상 전력을 격퇴하려 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은 미드웨이 해전, 산호해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에 이어 태평양 전쟁에서 네 번째로 벌어진 항공모함 중심의 해전이었다. 일본은 과달카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함대를 투입했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도 태스크 포스(기동함대)를 배치하면서 해전이 발발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중 과달카날 전역의 일환으로 발생한 항공모함 전투이다. 1942년 8월, 미군이 과달카날을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이를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시도했으며,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에서의 지상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미 해군의 항공 지원을 차단해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대규모 해상 전력을 투입하여 미 해군과 충돌하게 되었고, 양측은 과달카날 근해에서 해전을 벌이게 되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은 미드웨이 해전, 산호해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에 이어 태평양 전쟁에서 네 번째로 벌어진 항공모함 중심의 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은 각각 강력한 항공모함 전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전함 [2]사우스다코타(BB-57) 및 순양함과 구축함 다수로 구성된 태스크 포스를 운용했으며,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쇼카쿠, 즈이카쿠, 준요와 전함 콘고, 하루나 등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전투에 임했다. 일본군은 특히 숙련된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을 동원하여 미군의 항공 전력을 무력화하려 했다.
전투는 10월 25일부터 정찰기와 함재기를 통한 탐색으로 시작되었으며, 10월 26일 아침 일본군이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 함재기들은 미 항공모함 호넷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다수의 폭탄과 어뢰를 명중시켰고, 결국 호넷은 심각한 손상을 입어 전투에서 이탈했다. 이후 미 해군이 퇴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호넷은 자침처리되어 침몰되었다. 한편, 미군 항공기들도 일본 항공모함 쇼카쿠를 공격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며, 일본 항공모함 즈이카쿠도 일부 손상을 입었다. 미군의 주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역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큰 손상을 입으며 전투 수행 능력을 상실했다.
전투는 10월 27일까지 지속되었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철수하게 되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의 항공모함 한 척을 침몰시키고 다른 한 척을 무력화했으며, 미군 함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일본은 이 전투에서 숙련된 조종사와 항공기를 대량으로 잃었으며, 이는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항공 전력의 쇠퇴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미 해군은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유지했고, 이후 전쟁에서 점차적으로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결국 산타크루즈 해전은 일본 해군이 마지막으로 대규모 항공모함 작전을 펼친 전투 중 하나로, 이후 태평양 전쟁의 흐름이 미국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산타크루즈 제도(Santa Cruz Islands):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에 속한 섬들 [2]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BB-57) : 미국 해군의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의 1번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태평양과 대서양 전선에서 활약한 전함이다. 1942년 취역한 후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 필리핀 해 해전 등 여러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력한 장갑과 화력을 갖추었으며, 특히 16인치(406mm) 주포 9문과 뛰어난 대공 방어 능력으로 유명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방어하며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막아냈고, 과달카날 해전에서는 일본 전함 기리시마를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 후 1947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1962년 퇴역 후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