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433 등록일 : 2022-08-06 ]
미륵사지는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 가운데 가장 크며, 미륵사는 백제 30대 [1]무왕이 세운 동양 최대 최고의 국가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과 선화공주가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밑의 큰 연못에서 [2]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정실 왕후인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지원으로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주요 공간을 둘러싸며 지붕이 있는 복도) 등을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1980년부터 1994년가지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이 회랑으로 둘러사인 것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지붕 양 끝을 장식하는 기와인 치미, 녹색 유약을 입혀 서까래 끝에 놓아 장식하는 기와인 녹유서까래기와, 석등 받침돌인 석등하대석, 전각이나 탑의 처마에 매다는 풍경인 금동풍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절의 배치 방식에서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법당 아래 빈 공간이 있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의 건물터에서 온돌이 발견되는 등 건물터와 유물로 보아 미륵사가 1600년대가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서원의 석탑은 2001년부터 해체, 보수하기 시작하여 2017년에 조립을 마쳤다. 2009년에 석탑을 해체하다가 탑 안의 중심에 세운 기둥돌 1층에서 사리를 넣으려고 만든 구멍을 발견하였으며, 이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넣어 둔 항아리인 금제사리호 등 [3]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나왔다. 또한 미륵사를 짓고 탑을 세운 내용을 기록한 사리봉영기(製舍利奉迎記)도 함께 발견하였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백제인의 뒤어난 공예 기술과 미적감각, 당시 국제적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가치를 가진다.
미륵사지에는 석탑, [4]당간지주 사찰문 앞에 깃발이나 불화를 꽂는 기둥 받침대, 석등하대석, 금동향로, 사리장엄구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독창적인 [5]가람절, 사찰배치, 목조 건축 기법을 알 수 있는 석탑, 백제공예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리장엄구, 유적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 적어 둔 사리봉영기(製舍利奉迎記)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출처 : 익산미륵사지 안내판 -
[1] 무왕(武王, 580년 ~ 641년) : 백제의 제30대 국왕(재위 : 600년 ~ 641년)
[2] 미륵삼존(彌勒三尊) : 불교 법당의 가운데 있는 미륵불과 그 왼쪽에 있는 법화림 보살(法花林菩薩), 그 오른쪽에 있는 대묘상 보살(大妙相菩薩)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법당에는 대개 주불이 좌우 보처를 거느린 형태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3]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 부처님 사리나 고승(高僧)의 유골을 탑이나 부도에 모시기 위해 만든 공예품
[4] 당간지주(幢竿支柱) :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다
[5] 가람(伽藍) :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서 불도를 닦는 사찰. 절을 말한다. 어원은 불교용어인 상가람마(Sa○-ghā-rā-ma)로서,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남자(比丘)와 출가한 여자(比丘尼)가 모여사는 곳이다. 이것을 한역(漢譯)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라 하였고, 줄여서 가람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과 선화공주가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밑의 큰 연못에서 [2]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정실 왕후인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지원으로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주요 공간을 둘러싸며 지붕이 있는 복도) 등을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1980년부터 1994년가지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이 회랑으로 둘러사인 것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지붕 양 끝을 장식하는 기와인 치미, 녹색 유약을 입혀 서까래 끝에 놓아 장식하는 기와인 녹유서까래기와, 석등 받침돌인 석등하대석, 전각이나 탑의 처마에 매다는 풍경인 금동풍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절의 배치 방식에서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법당 아래 빈 공간이 있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의 건물터에서 온돌이 발견되는 등 건물터와 유물로 보아 미륵사가 1600년대가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서원의 석탑은 2001년부터 해체, 보수하기 시작하여 2017년에 조립을 마쳤다. 2009년에 석탑을 해체하다가 탑 안의 중심에 세운 기둥돌 1층에서 사리를 넣으려고 만든 구멍을 발견하였으며, 이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넣어 둔 항아리인 금제사리호 등 [3]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나왔다. 또한 미륵사를 짓고 탑을 세운 내용을 기록한 사리봉영기(製舍利奉迎記)도 함께 발견하였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백제인의 뒤어난 공예 기술과 미적감각, 당시 국제적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가치를 가진다.
미륵사지에는 석탑, [4]당간지주 사찰문 앞에 깃발이나 불화를 꽂는 기둥 받침대, 석등하대석, 금동향로, 사리장엄구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독창적인 [5]가람절, 사찰배치, 목조 건축 기법을 알 수 있는 석탑, 백제공예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리장엄구, 유적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 적어 둔 사리봉영기(製舍利奉迎記)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출처 : 익산미륵사지 안내판 -
[1] 무왕(武王, 580년 ~ 641년) : 백제의 제30대 국왕(재위 : 600년 ~ 641년)
[2] 미륵삼존(彌勒三尊) : 불교 법당의 가운데 있는 미륵불과 그 왼쪽에 있는 법화림 보살(法花林菩薩), 그 오른쪽에 있는 대묘상 보살(大妙相菩薩)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법당에는 대개 주불이 좌우 보처를 거느린 형태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3]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 부처님 사리나 고승(高僧)의 유골을 탑이나 부도에 모시기 위해 만든 공예품
[4] 당간지주(幢竿支柱) :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다
[5] 가람(伽藍) :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서 불도를 닦는 사찰. 절을 말한다. 어원은 불교용어인 상가람마(Sa○-ghā-rā-ma)로서,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남자(比丘)와 출가한 여자(比丘尼)가 모여사는 곳이다. 이것을 한역(漢譯)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라 하였고, 줄여서 가람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는 독창적인 가람절, 사찰배치, 목조 건축 기법을 알 수 있는 석탑, 백제공예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리장엄구, 유적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 적어 둔 사리봉영기(製舍利奉迎記)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석탑 : 7세기에 미륵사가 처음 지어질 당시 세워진 세 개의 탑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많은 석재들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던 석재를 참고해 9층으로 복원된 동쪽 석탑과 같은 규모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탑이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석탑 : 층마다 모서리의 기둥이 다른 기둥보다 살짝 높게 된 형태,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 부분이 솟아오르는 모양 등 목조건축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석탑 :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1층에는 사방에서 계단을 통해 출입이 가능한 십자형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러 개의 석재를 쌓아 올린 중심기둥이 세워져 있다. 2009년 1월 가장 아래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백제황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석탑 : 6층 일부까지만 남아 큰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미륵사지 석탑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수리가 완료된 탑의 높이는 약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830톤에 이른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석탑은 7세기에 미륵사가 처음 지어질 당시 세워진 세 개의 탑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많은 석재들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던 석재를 참고해 9층으로 복원된 동쪽 석탑과 같은 규모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탑이다. 층마다 모서리의 기둥이 다른 기둥보다 살짝 높게 된 형태,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 부분이 솟아오르는 모양 등 목조건축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1층에는 사방에서 계단을 통해 출입이 가능한 십자형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러 개의 석재를 쌓아 올린 중심기둥이 세워져 있다. 2009년 1월 가장 아래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백제황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6층 일부까지만 남아 큰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미륵사지 석탑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촬영일 : 2022-08-04]
동원구층석탑 : 1974년 동원의 탑 터를 발굴하여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밝혔다.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 [출처 : 동원 구층석탑 안내판의 글]
![동원구층석탑 : 1974년 동원의 탑 터를 발굴하여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밝혔다.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 [출처 : 동원 구층석탑 안내판의 글]](https://static.tmstory.com/repository/resizing/sm/city_story/202208/ED26EA2CC68E45398B13E3D3EDF752991659881323.jpg)
[촬영일 : 2022-08-04]
동원구층석탑 : 1974년 동원의 탑 터를 발굴하여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밝혔다.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 [출처 : 동원 구층석탑 안내판의 글]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석탑과 동원구층석탑사이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산은 미륵산( 용화산)이다. 익산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촬영일 : 2022-08-04]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서편) :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 두는 길쭉한 깃대이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받쳐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후대 남회랑 안마당에 약 90m간격으로 서 있는 당간지주 2기는 크기와 형태, 제작 기법이 서로 같다. 현재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있는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나온 석재가 당간 형태임을 보아 당간은 돌로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촬영일 : 2022-08-04]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동편) :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 두는 길쭉한 깃대이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받쳐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후대 남회랑 안마당에 약 90m간격으로 서 있는 당간지주 2기는 크기와 형태, 제작 기법이 서로 같다. 현재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있는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나온 석재가 당간 형태임을 보아 당간은 돌로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연못(동편) : 불경에서는 극락세계에 칠보로 꾸민 연못이 있어 그 안에는 청정한 물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연꽃이 미묘한 향내를 은은하게 내뿜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극락세계의 상직으로 연못을 만든다. 미륵사지 입구에서 중앙으로 난 길의 양옆 연못 2곳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당간지주, 남회랑과 함께 만들어졌다
[촬영일 : 2022-08-04]
미륵사지 연못(서편) : 연못에 드리운 미륵사지석탑, 동원구층석탑, 가운데 미륵산과 나무한구루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을 자아내고 있다.
[촬영일 : 2022-08-04]
뒤쪽에서 바라본 미륵사지석탑과 동원구층석탑
[촬영일 : 2022-08-04]
미륵산을 등뒤에 두고 세워졌던 미륵사지내 미륵사지석탑과 동원구층석탑
[촬영일 : 2022-08-04]
국립익산박물관 : 미륵사지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된 19,000여점의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개관하여 미륵사지 출토 및 사리장엄 발견 유물에 대한 다양한 전시 및 교육프로그램을 선사한다

[촬영일 : 2022-08-04]
백제인의 간절한 염원, 사리장엄구 - 국립익산박물관

[촬영일 : 2022-08-04]
백제인의 간절한 염원, 사리장엄구 - 국립익산박물관
[촬영일 : 2022-08-04]
유리제사리병, 금제사리병받침,금제사리내함 : 국립익산박물관소재

[촬영일 : 2022-08-04]
익산국립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중원 목탑 :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촬영일 : 2022-08-04]
서원금당터 : 금당은 사찰에서 불상을 모신 법당, 대웅전 등의 중심 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금색의 불상을 모셨다는 설과 건물 내부를 금색으로 칠했다는 설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서원금당터는 동원금당터와 미륵사지의 중심에서 서쪽과 동쪽에 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다
[촬영일 : 2022-08-04]
중원금당터 :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삼존이 나타났던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을 3곳에 두었다고 하며 발굴조사에서도 동원, 서원, 중원 즉, 삼원에 각각 금당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곳은 중원 금당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석재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2층으로 된 기단 일부와 남쪽과 북쪽에 계단 흔적이 남아있다
[촬영일 : 2022-08-04]
동원금당터 : 이곳은 동원으로 금당이 있던 곳이며 삼원의 금당 터 중에서 기단부 석재가 가장 많이 남아있어 원래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촬영일 : 2022-08-04]
강당터 : 강당은 사찰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불경을 강의하고 설법하며 법외화 같은 불교 의식을 하던 곳이다. 강당터는 중원 목탑과 금당터를 지나는 중심선을 그렸을 때 금당 터 북쪽에 있다